지난달 28일 서울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의 ‘어린이 시티 플래너’에 참여한 학생들이 막대와 스티로폼, 표지판 도안 등을 이용해 각자 원하는 도시를 만들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무료로 나눠 주는 가게. 욕설과 담배 금지. 대중교통과 자전거만 이용 가능. 어린이 전용 극장. 팽이 배틀 경기장. 순간이동 장소.
아이들이 꿈꾸는 도시의 모습이다.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 초등학교 3~6학년생이 스티로폼과 막대기로 다양한 건물을 짓고 있다. 어떤 용도인지 알리는 표지판 문구도 직접 써서 붙였다. ‘어린이 시티 플래너’ 프로그램이다. 아이들 관점에서 직접 도시계획가가 되어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보는 내용이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는 ‘예술로 놀이터’, ‘예술로 부모플러스’ 등 ‘체험-과정-놀이’ 중심 예술교육을 진행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그림책 작가, 시인, 무용가 등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이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해 꾸린다. 시티 플래너도 이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악기연주·미술…기존 예술교육 벗어나
체험-과정-놀이 구성 창의예술교육
이미지·소리·영상 접목하거나
어린 시민 입장에서 생활공간 바꿔봐
작품 완성도보다 다양한 해석이 중요
실패 과정 등 통해 창의력 끌어내기도
지난달 27일 서울 양천구 서서울예술교육센터 프로그램 ‘소리야 놀자’에 참여한 학생들이 입에 팔을 대고 불며 방귀 소리를 흉내 내고 있다.
어린이 눈으로 ‘내가 원하는 도시’ 설계해
김소연(서울 봉현초 3)양은 학교와 텃밭을 지었다. 실제 학교에서 상추랑 당근을 길러 먹는데 다른 친구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다. 씨앗과 작물을 함부로 밟지 않도록 ‘들어오지 말라’는 주의 표시와 ‘식물이 자라고 있다’는 식물 표지판을 앞에 세웠다. 김양은 “보통 채소를 마트에서 사서 먹는데 직접 키우면 더 건강하고 깨끗한 채소를 먹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직접 길러보면 좋을 거 같아 만들었다”고 했다.
김도연(서울 구암초 4)양은 어린이 전용 극장을 세웠다. “어른들이 자녀를 데리고 영화를 보러 와서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아이와 계속 이야기를 하거나 심지어 통화도 한다. 도저히 집중해서 영화를 볼 수가 없다.” 그는 예의를 지키지 않는 어른들을 보며 어린이만 입장 가능한 극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특히 놀이공간을 많이 만들었다. 그만큼 생활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 만한 장소가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냇가를 만들어 건너다닐 수 있는 구름다리를 놓고 옆에 미끄럼틀과 정글짐도 만들었다. 평소 뭔가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탓에 ‘뛰지 마세요’란 표지판 대신 ‘뛰어놀아요’란 표지판을 세웠다. 공간 천장에 시간을 알리는 종도 달았다. 시계가 없는 사람이 놀다가 학원에 가거나 일정에 맞춰서 움직이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프로그램을 운영한 어린이문화디자이너 엄효정씨는 “어른들은 어린이 문화라고 하면 주로 놀이터와 장난감을 떠올린다. 상업적 구조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서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고민하고 바꿔보는 작업”이라며 “수학은 옳고 그름이 정확하지만 예술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기술적 완성도보다 과정을 중시한다”고 했다. 예술은 맞다 틀리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아이들이 계획·설계하고 구현해서 실패하는 일을 반복할 때 창의력이 생긴다. 스스로 깨닫고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양천구 서서울예술교육센터 프로그램 ‘소리야 놀자’에 참여한 학생들이 문고리 잡는 소리 효과음을 녹음하고 있다.
주변 소리 찾아 빈 영상에 효과음 입혀요
부모는 아이의 관심사를 파악해 하나라도 더 경험해볼 기회를 주고 싶어 한다. 감성을 길러주는 예술교육도 하고 싶다. 단순히 악기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교육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작업을 이끌고, 부모와 아이가 함께 예술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비싼 놀이학원에 가지 않아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서서울예술교육센터는 상대적으로 문화기반 시설이 부족한 서울 서남권 지역에 있는 어린이·청소년 예술교육 전용 공간이다. 서울 양천구 옛 김포가압장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10월 문을 열었다. 초·중학생 대상으로 지역 커뮤니티 프로그램과 학교 참여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오전 센터 주변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아이들은 팔을 입에 갖다 대고 힘차게 불어 방귀 소리를 냈다. 한쪽에서는 일렬로 서서 열심히 땅에 발을 구르고 있었다. 김우순 강사는 스마트폰을 가까이 대고 아이들이 내는 소리를 녹음했다.
‘소리야 놀자’는 아이들이 특정 소리를 선택해 몸을 이용해 그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보고, 이를 녹음해서 이야기에 입히는 활동이다. 강의를 맡은 고은진씨는 다큐멘터리 연출자다. 예술가교사(TA·Teaching Artist)로 활동하며 자신의 분야와 접목해 창의적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한다.
“평소 흘려보냈던 일상 소리를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방귀 소리를 내며 장난치는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특정 이미지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한 가지 이미지를 보며 상상하고, 오감을 이용해 다양하게 표현해보는 게 필요하다는 것.
이날 아이들은 <방귀쟁이 며느리>란 책을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을 더빙해보는 활동을 했다. 사전에 강사들이 소리를 빼고 직접 대사를 녹음했다. 아이들이 소리가 없는 부분을 직접 채워보고 대사도 넣어보게 하기 위해서다. 영상을 본 뒤 아이들은 다양하게 소리를 만들었다. 문고리 잡는 소리는 전압기 손잡이를 움직여서, 수레가 움직이며 나는 그릇 소리는 의자를 흔들어서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레인스틱, 스프링 드럼, 에그 셰이커 등 비 내리거나 천둥 치는 자연의 소리를 흉내 내 만든 타악기로도 소리를 냈다. 정은초양은 “소리를 듣기만 하다 직접 만들어보니 신기했다. 친구들이랑 함께 소리를 찾는 것이 재밌었다”고 했다. 이주은양은 “파도 소리 듣고 떠오르는 걸 종이에 그려봤다. 처음 해보는 거였는데 선으로 파도가 치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했다.
소리를 듣고 이미지를 상상하거나 이미지를 보고 소리를 상상할 수도 있다. 이날은 파도가 부서지는 걸 물방울이 번지는 그림으로 그려보거나 밀려오는 파도에 깜짝 놀란 마음을 심장 박동 표시처럼 표현하기도 했다. 각자 경험과 생각이 다르니 비슷한 소리를 놓고도 아이마다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이는 집에서도 아이와 손쉽게 해볼 수 있는 활동이다.
유엔어린이권리조약 31조 ‘놀이와 휴식의 권리’는 ‘모든 어린이는 놀고 쉴 권리가 있고, 문화 예술 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고 나와 있다. 아이들은 그냥 밖에 나가기만 해도, 친구들과 모이기만 해도 알아서 놀 거리를 찾는다. 예술교육은 이런 아이들의 놀 거리를 충만하게 한다.
글·사진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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