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경남 산청군 덕산초교 학생들이 수학버스에 올라 ‘사이클로이드 미끄럼틀 실험’을 하고 있다. 수학문화도서관 제공
“우와, 우주선 같아요!”
경남 산청군 신천초등학교 운동장에 ‘찾아가는 수꿈이 수학버스’(이하 수학버스)가 등장한 지난달 19일,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이 작은 학교에서는 전교생 50여명이 참여하는 ‘수학 축제’가 열렸다. 아이들은 45인승짜리 커다란 수학버스에 올라 교과서로만 접했던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손으로 만져보고 ‘사이클로이드(cycloid) 미끄럼틀 실험’을 해봤다.
‘직선보다 빠른 곡선’ 알게 됐어요!
이 학교 4학년 고이수군은 친구와 함께 직선 미끄럼틀과 사이클로이드 미끄럼틀에 각각 직접 공을 굴려 봤다. 두 미끄럼틀 위에서 동시에 공을 굴리기 시작했을 때, 직선과 사이클로이드 곡선 가운데 어떤 쪽 공이 더 빨리 내려올까를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고군은 “눈으로 보고 머릿속으로 생각했을 때는 당연히 직선이 짧아 보여서, 직선 미끄럼틀 위의 공이 빨리 내려올 거라 생각했다”며 “하지만 시작과 끝 지점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은, 길이가 더 길어 보였던 사이클로이드 곡선 쪽이었다”고 했다. “사이클로이드는 지구상에서 중력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루는 곡선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최단강하곡선’이라고 불리더라고요. 가장 짧은 길이 가장 빠른 길이 아닐 수도 있는 게 신기했어요.”
평소 수학이라면 어렵게만 느껴져 흥미가 없던 고군과 친구들은 수학버스에 오른 뒤 다양한 도형과 프랙털 구조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
고군은 “친구들하고 큰 버스에 올라탔는데 의자가 있을 자리에 커다란 실험교구가 가득해서 놀랐다”며 “‘수학버스’라고 해서 지루할 줄 알았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신천초교 학생들이 ’패턴큐브 게임’ 활동을 하고 있다.(사진 왼쪽) 지난달 17일 경남 하동군 묵계초교 학생들이 ‘다빈치 다리 만들기’ 실험을 하고 있다. 수학문화도서관 제공
‘살아있는 수학교육 확산’ 뜻으로 시작
수학버스는 비영리 사단법인 ‘수학문화도서관’이 진행하는 ‘체험수학’ 프로그램이다. 체험수학이란 수식과 증명, 정의와 공식 등으로 이뤄진 추상적인 수학에서 벗어나 스스로 만들고 활동해보는 수학을 말한다. 수학버스는 지난달 17일 경남 하동군 묵계초등학교에서 첫 손님을 태웠다. 7월19일까지 2박3일 동안 경남 산청군 덕산초·중·고교, 신천초교를 찾은 수학버스에서 350여명의 학생들이 체험수학을 경험했다.
교육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수학버스는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였던 5년 전부터 관심을 갖고 진행해온 프로그램이다. 박 의원과 수학문화도서관 장훈 이사장은 ‘고교 수학교사, 수학교육과 교수 출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지난 2012년 인천 옹진군 대청도에서 진행한 ‘신기한 수학버스’ 경험을 시작으로 수학을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학문으로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장 이사장은 수학자로서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수학 교육’을 경험시켜주고 싶어 대형버스 면허도 취득했다. 45인승 수학버스를 직접 운전해 작은 학교들을 찾아가 아이들을 만난다.
장 이사장은 “수학공부의 목표는 바로 ‘수학적 사고’여야 한다. 단순히 계산만 잘하거나, 판에 박힌 문제를 기계적으로 풀어내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며 “실험해보는 기회를 통해 피상적 지식을 내면화하고 재발견하는 탐구활동이 가능해진다”고 했다. “<유클리드 원론>을 읽은 사람이 드물지만 사실 이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출판된 책입니다. 그만큼 수학은 우리 일상에 깊게 스며들어 있어요. 오직 상급학교 시험을 위한 수학공부를 하면 수학은 일상에서 쓸모없는 학문이라는 등 부정적인 인식만 생깁니다. 문제를 탐구하고 관찰하는 힘, 논리적 분석력을 키워주는 수학문화 보급을 위해서는 체험수학이 필요합니다.”
지난달 19일 경남 산청군 신천초교 학생들이 ‘수학버스’ 체험을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사진 위) 장훈 이사장은 ‘찾아가는 수꿈이 수학버스’를 직접 운전하기 위해 대형버스 면허를 취득했다. 수학문화도서관 제공
모래 이용해 배우는 포물선과 쌍곡선
체험교육이라면 흔히 과학교과를 떠올리지만 수학버스의 재미와 교육적 효과도 상당하다. 수학버스 내부는 ‘수학자의 실험실’이라는 주제로 피타고라스 정리 수조, 톱니바퀴로 배우는 배수 등 실험장치가 설치돼 있다. 외부에도 부스 형식으로 건축·자연·게임 속 수학 등을 체험할 수 있게 해놨다.
모래 등 자연물을 이용해 원뿔이나 타원, 포물선 등 도형 및 선의 원리를 배우는 ‘모래 상자’도 아이들에게 인기다. 네모난 상자에 모래를 가득 담은 뒤 손잡이를 당기면 상자 밑에 있는 구멍과 선 사이로 모래가 빠지게 되는데, 이때 타원과 쌍곡선·포물선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빠져나간 모래 자국을 통해 포물선의 초점과 선분의 길이 구하는 법 등을 배우게 되는 것. 신천초 4학년 조건우군은 “수학 교과서에서 그림으로만 봤던 포물선이, 상자 아래로 빠져 내려가는 모래를 통해 눈앞에 등장했다”며 “모래가 구멍으로 똑바로 흘러내리는 성질을 관찰하면서 우리 주변에 포물선 모양이 또 없나 찾아보게 됐다”고 했다.
수학버스 활동을 지켜본 신천초 문정숙 교감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연산 문제 등에서 난도가 높아지는데,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 추상 개념을 실험을 통해 체화하면 수학에 대한 흥미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수학버스 안팎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실험은 ‘엄마수학기자단’(이하 기자단)이 설명해준다. 기자단은 경력단절 여성들의 전문성을 교육현장에서 활용하자는 취지로 꾸렸다. 수학문화도서관과 여성인력개발센터가 협력해서 기자단 전문교육부터 진행하는데,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기자단으로 활동할 수 있다. 이들은 지난해 9월 제주수학축전 참가를 시작으로 체험수학의 효과와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기자단에서 활동하는 송경화 지도교사는 “교육 소외지역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수학’을 가르쳐주고 있다”며 “체험수학을 경험한 아이들이 ‘이렇게 배울 수 있으면 맨날 수학공부만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보람이 크다”고 했다.
박경미 의원은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과학관 등에 갈 기회가 많지만, 수학문화 접근이 어려운 교육 소외지역에 기자단 선생님들과 함께 찾아가는 활동이 뜻깊다”며 “지역 대상 맞춤형 수학문화 콘텐츠를 보급하는 등 ‘생활친화적 수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갈 것”이라고 했다. “수학이 사실 편한 과목은 아니죠.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추상적 학문이라는 특성상, 아이들이 보고 만지는 수학 등 활동을 통해 더욱 문턱 없이 접할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수학버스 체험을 원하면 사단법인 수학문화도서관 전자우편(
mclib@mathculture.or.kr)으로 ‘신청 사연’을 보내면 된다.
교육청이 운영하는 수학체험센터도 있어
주변을 돌아보면 곳곳에 수학을 체험할 창구가 적지 않다. 2015년 한국에서 공교육 기반으로는 처음으로 문을 연
경남 양산시 ‘양산수학체험센터’(이하 센터)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경상남도교육청이 수학교육 선진화 방안을 바탕으로 ‘찾아가는 수학체험교실’을 비롯해 매년 2∼3회 수학자와 함께하는 학부모 연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하는 ‘토요수학체험교실’이 인기다. 센터의 윤연경 교사는 “평일에 교과서에서 배운 수학 개념을 교구를 활용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라며 “도형 내·외각의 합을 구하는 과정을 체험해보고, 아르키메데스 퍼즐을 이용해 ‘평면’의 정의를 이해하는 등 아이들이 재미있어한다”고 했다.
‘수학무한상상실’ 등 관람 공간이나 보호자·친구와 함께 놀면서 공부하는 수학클리닉 등도 인기가 좋다. 프로그램은 누리집(ysfunmath.or.kr)에서 학교 및 가족 단위로 예약을 받아 진행한다.
센터가 체험수학 보급을 위해 진행해온 ‘양산체험수학축전’(이하 축전)도 올해 5회째를 맞이했다. 오는 10월14~15일 양산워터파크에서 열린다. 축전은 수학 유시시(UCC)대회, 체험수학 토크콘서트, 구조물 전시 등 학부모와 교사, 학생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로 꾸려질 예정이다. 윤 교사는 “수학교육은 ‘창의성’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교실을 벗어나 보고 듣고 느껴 보는 체험수학이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탐구력을 키워주고 ‘즐겁게 공부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문제집과 교과서도 중요하지만 몸을 움직여 경험해본 수학은 평생 기억되는 ‘진짜 공부’가 될 겁니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