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용인 수지고 체인지메이커 동아리 ‘콤마’ 학생들은 힐링키트를 만들어 위조성적표, 컬러링북 도안, 팔찌, 비타민, 간식 등을 담아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고등학교 입학 후, 과학시간에 자율탐구 프로젝트를 모둠별로 진행했다. 학생들은 대학 ‘팀플 스트레스’ 얘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황당하고 짜증나는 일들이 많았다. 팀원 간 의견 조율도 힘들고, 누구는 열심히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무임승차했다. 간혹 자신이 맡은 일을 기한 내에 하지 않은 친구 탓에 결과물을 완성 못 하고 점수가 깎이기도 했다. 조별 수행평가도 스트레스를 받긴 마찬가지였다.
팀 프로젝트를 해본 학생이라면 한번쯤 겪었을 법한 이야기다. 이민영(2학년)양과 한해인(2학년)양은 밤새 과제를 하다 아픈 어깨를 서로 주물러주고 힘든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느 순간 위안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교내에서 모두를 위한 ‘위로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경기도 용인 수지고의 ‘힐링 나눔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했다. 두 학생의 생각에 공감한 세 친구가 합류해 ‘콤마’라는 동아리가 생겼다. 콤마는 ‘함께’란 뜻의 ‘콤’(com)과 ‘나의 여유’란 뜻의 ‘마이 어포드’(my afford)의 앞 글자를 딴 말. ‘경쟁에 지친 우리, 함께 보듬어주자’는 슬로건도 만들었다.
학생들은 ‘힐링’이나 위로·공유·공감을 주제로 조사에 나섰다. 서울시청의 ‘마음약방 자판기’나 지하철역 감정상자 ‘달콤창고’ 프로젝트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후 학생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성적표과 착한 인성 등을 평가한 ‘위조 성적표’와 “먹고 힘내”라는 의미의 비타민·젤리 등 간식거리, 상처받았을 때 붙이라는 뜻으로 반창고 등을 힐링키트에 넣기로 했다.
‘아임 유어 콤마, 유어 마이 콤마’(I’m your COMMA, You’re my COMMA)라는 문구를 넣은 팔찌도 제작했다. ‘나는 너의 쉼표이고 너도 나의 쉼표’라는 의미로 우리는 서로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리는 것이다. 직접 디자인해 그린 컬러링북 도안과 편지지도 담았다.
키트는 학생들이 받는 이를 정해서 혹은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쓴 뒤 콤마에 건네면 힐링키트에 편지를 넣어 배달해주는 식으로 나눠줬다. 김지은양은 “지난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란 책을 읽고 반에서 익명의 손편지 활동을 벌였다. 사람들이 익명으로 편지를 보내 고민을 말하면 답장해주는 내용인데, 의미 없는 답변인데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로받는 걸 보고 직접 해본 것”이라고 했다.
김현수양은 “키트를 나눈 뒤 편지를 통해 친구에게 평소 못 했던 말, 미안한 말을 건네고 ‘다들 힘든데 힘내!’라고 격려하면서 교실 분위기 자체가 좋아졌다”고 했다. 실제 편지를 건네받고 감동해서 운 학생도 있었다.
‘#경쟁에 지친 우리에게 #수지고 위로공동체 만들기 프로젝트’. 수지고 1층 계단 벽면에 붙은 ‘위로의 계단’ 설명이다. 안내문에는 자살 예방을 위해 만든 한강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 문구가 적힌 계단을 오르며 학교생활에 힘을 얻고 초성 글귀를 통해 친구와 즐거운 추억을 만들라는 내용도 적혀 있다. 콤마가 등하교 때나 쉬는 시간에 학생들이 자주 다니는 교내 계단 1층부터 5층까지 문구를 적은 패널을 붙인 것. 학생들은 드라마 명대사나 책, 인터넷을 뒤져 의미 있는 말을 찾았다. 공감, 우정, 격려 등 주제별로 1인당 다섯개씩 문구를 정해 온 뒤 투표로 최종 결정했다.
이렇게 붙인 문구는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대, 하지만 괜찮아,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지금 많이 힘들어? 그런데 신은 견딜 수 있을 고난만 준대, 넌 참 큰사람인가보다’, ‘문어지지마, 내가 보기보단 강아지, 인생은 다 그런 고래, 이 또한 지나가오리’ 등이다. 내용에 맞는 문어, 강아지, 고래, 가오리 그림도 아기자기하게 그려넣었다.
계단 틈틈이 ‘여기 밟으면 오늘 일 다 잘됨!’, ‘여기 밟으면 먹고 싶은 거 먹게 됨!’이란 깨알 문구도 넣었다. 한양은 “마포대교 사례를 보면서 자살하려고 갔다가 문구를 보고 삶의 힘을 얻고, 사람들이 예쁘다고 사진 찍으며 공간의 의미 자체를 바꿨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러 가며 지나치는 곳이 아니라 위로를 받고 생각을 환기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변지윤양은 “격언처럼 일방적으로 주입하면 힐링보다는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고, 공감도 안 된다. 가령, 초성 ‘ㅇㄱㅅㅇ’를 적어두면 ‘울고 싶어’라는 말도 될 수 있지만 ‘웃고 싶어’나 ‘안고 싶어’로 바꿔볼 수도 있다. 같은 공간이지만 자기 기분에 따라 해석할 수 있고 갈 때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위로의 계단은 콤마와 함께 미술에 재능 있고 취지에 공감한 친구들이 협업해 만들었다. 미술 전공을 준비하는 김현수양은 “원래 계단에 영어 속담이나 유명 격언이 붙어 있었다. ‘노 페인, 노 게인스’(no pain, no gains) 같은 문구는 초등학교 때부터 봐온 터라 애들이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식의 이야기로 문구를 바꾸자 흥미 있어 하고 관심을 보이더라.”
처음부터 프로젝트가 술술 풀린 건 아니었다. 힐링키트 상자 디자인부터 안에 담을 내용물 등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위로의 계단도 각자 맡은 일을 기한 내에 처리하지 못해 일정이 밀리기도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각자 원해서 하는 일인 만큼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맞춰갔다.
김지은양은 “평소 소심해서 싫은 소리 못 하고 상대방 기분 상할까봐 화도 제대로 못 냈는데 프로젝트를 하며 맘에 안 드는 걸 표출하는 것이 관계를 한발 나아가게 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갈등이 생겼을 때도 안에 무조건 담아두기보다 다 같이 부딪히고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며 결론으로 나아갔다”며 “이 활동을 하며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운 거 같다”고 했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활동하는 과정 자체에서 공감과 위로를 받았다. 입시 경쟁에 찌든 우리가 친구한테 따뜻한 감정을 먼저 건네고 함께 사는 학교를 만드는 일이 의미 있었다. 다른 학교에서도 이 키트를 만들어 나눴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박현아 지도교사는 “이 지역이 평준화된 지 3년 됐지만 아이들이 욕심이 많아 전 과목을 놓치지 않고 너무 열심히 한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 같다”고 했다. “콤마는 힘들 때 ‘괜찮냐’라는 말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된다는 걸 알고 친구들을 위해 짬짬이 활동을 벌였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자발적으로 모여 ‘쉼표가 되는 학교’ 문화를 만들려고 애썼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변화를 이뤄내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게 보였다.”
콤마의 프로젝트는 ‘체인지메이커’ 활동으로 이뤄졌다. 체인지메이커는 사단법인 아쇼카 한국의 유스벤처 프로그램으로 학생 스스로 발견한 문제, 변화시키고픈 일을 찾아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문제 해결 프로젝트다. 현재 전국 200여개 학교에서 동아리 형태나 자유학기제, 진로 수업 등을 통해 진행 중이다. 글·사진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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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마’와 미술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교내 계단에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담은 패널을 붙여 ‘위로의 계단’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