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한 법관들이 자리에 앉아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한겨레 사설] ‘블랙리스트’ 조사 나선 법관들, 사법개혁 불씨 되길
전국 각급 법원을 대표하는 판사 100명이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어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직접 조사하기로 결의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향해 조사권한을 위임해줄 것과, 법원행정처 차장과 법관들이 사용한 컴퓨터를 보존하고 조사 방해자는 직무배제할 것도 요구했다. 양 대법원장은 의혹이 더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조사 결과에 따라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은 물론 양 대법원장의 책임 문제로까지 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법관들은 그동안 사법부 독립이 흔들리거나 내부의 비민주적 행태가 드러날 때마다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이번에도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를 문제삼는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행사를 앞두고 법원행정처가 압력을 행사한 게 발단이 됐다. 진상조사위가 조사에 나섰으나 법원행정처장이 블랙리스트 관련 컴퓨터 조사를 거부하고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선에서 미봉하는 바람에 논란이 커졌다. 전국 법원에서 줄줄이 회의를 열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만큼 법원 내부에 쌓여온 적폐가 심각했다는 뜻일 것이다. 철저한 진상규명으로 8년 전 신영철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의 재판 간섭 사건처럼 용두사미로 끝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애초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행사를 둘러싼 갈등은 대법원 수뇌부에 대한 판사들의 불신에서 비롯됐다. 제왕적 대법원장이 문제가 된 데는 ‘양승태 대법원 체제’가 국민적 신뢰를 잃은 것도 한 요인이 됐을 것이다. 특히 박근혜 정권 들어 권력 주변에서 불거진 석연찮은 행적은 사법부 불신을 불러왔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업무일지에 등장한 ‘법원 길들이기’나 ‘법원 지도층과의 커뮤니케이션’ 등의 표현들은 청와대와 대법원의 부적절한 거래 의혹만 남긴 채 덮였다. 청와대 민정수석과 법원행정처 차장의 빈번한 연락도 마찬가지다.
법관들은 이번 회의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과 관련한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책임 규명은 물론이고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화도 결의했다고 한다. 대표회의가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 혁파와 법원행정처 축소 등 사법부 관료주의를 혁신하고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불씨가 되기를 기대한다.
[중앙일보 사설] 사법부의 정치화 우려된다
사법부의 내홍(內訌)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전국 법원의 판사 100명으로 구성된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어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추가 조사키로 한 지난 19일의 결의 내용을 법원행정처에 전달했다. 판사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과 수뇌부를 믿지 못해 직접 규명에 나서겠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판사 사회 내부에서 대표성 논란과 함께 사법부까지 정치 바람을 타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사태는 올 3월 법원 내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판사들을 상대로 ‘사법 독립과 법관 인사제도에 관한 설문조사’와 학술대회를 추진하면서 촉발됐다. 이 움직임이 알려지자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가 행사를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나아가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판사들의 명단을 관리하고 있다는 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로 번졌다. 진상조사위원회는 블랙리스트에 대해선 ‘사실무근’으로, 사법행정권에 대해선 조직적 개입은 없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발하는 일부 판사들이 불만을 제기하면서 양승태 체제를 둘러싼 갈등과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비대한 권한을 행사하는데도 견제할 수단이 없다는 지적에는 일리가 있다. 예산권과 인사권을 틀어쥐고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특정 세력이 힘을 과시하듯 집단행동을 하는 모양새는 순수성과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
사법부는 대대적인 ‘사법 권력’의 교체기에 들어간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중 9월 퇴임하는 양 대법원장을 비롯해 대법관 13명 가운데 12명을 임명한다. 사법개혁을 주장하는 판사 출신이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된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일수록 양심과 소신으로 법의 안정성과 독립을 지켜내는 것이 판사의 숙명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사법부가 정치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3권 분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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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보는 사설]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화 논란 지난달 19일, 사법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전국 각급 법원을 대표하는 판사 100명이 모여 법관대표회의를 열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사법부 독립이 흔들리거나 재판의 민주적인 절차가 흔들릴 때마다 소집되곤 했다. 회의의 소집 자체에 판사들이 대법원장 등 사법부 수뇌부의 결정과 절차에 대한 불신임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법관대표회의는 ‘사법 파동’의 성격을 띠어왔다. 최초의 사법 파동은 1971년에 있었다. 반공법 위반 등의 사건에 무죄나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 이범렬 부장판사 등을 당시 정부가 구속하려 하자, 전국의 법관 150여명이 사표를 낸 것이다. 1998년에는 소장 판사 430여명이 법원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명을 벌였고, 1993년에는 법관 신분 보장, 2003년에는 대법관 인사 구조 개편을 요구하기 위해 전국법관회의가 개최되었다. 지난달 28일,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번 법관대표회의의 제안을 상당 부분 수용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1심 재판의 전면 단독화, 법관 인사 이원화와 고등법원 부장판사 보임, 법관 근무평정 및 연임제도, 법관 전보인사와 사무분담, 사법행정권의 적절한 분산과 견제 등 사법 개혁 과제를 나열한 뒤, 이를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나아가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상설화 결의를 적극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엇갈린다. 상설화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대법원장의 권한을 분산하고 법원행정처의 관료화를 완화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전국법관대표회의의 대표성을 문제 삼으며 이 조직이 ‘판사 노조’의 성격을 띨 것이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연재사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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