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 나트륨 함량이 1100㎎이야. 하루 권장 나트륨 섭취량이 2000㎎인데.”
경희여자고등학교 3학년 최한비양은 매주 금요일 2~3교시에 ‘교복 입은 연구원’ 모드로 변신한다. 홍창섭 수학교사의 ‘실용 통계수업’에서 ‘나트륨 인식 및 섭취량 조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그룹을 이룬 안세민·홍정민양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다. ‘염도 측정기’를 활용해 학교 급식의 염도부터 친구들이 자주 찾는 분식집과 편의점 ‘베스트 5’ 메뉴의 나트륨 함량 등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있다.
경희여고, 진로 연계한 이색 통계수업
이들은 통계 자료조사 방법 가운데 하나인 ‘질문지법’을 활용해 25개 문항을 만들었다. 국회도서관에서 ‘나트륨’ 관련 문헌 자료를 탐색하며 가설을 세우고, 홍창섭 교사의 피드백을 통해 조사 목적을 명확히 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제시한 청소년의 일일 나트륨 섭취량은 다음 중 어느 정도입니까?’, ‘귀하는 학교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할 경우, 주로 어떤 메뉴를 주문하십니까?’ 등 식습관과 염도 함유량에 대한 사지선다 문항을 만들었다. 교내 110명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뒤 수집한 자료를 분석해 7월 중 ‘통계 포스터’를 만들어 ‘경희여고 학생들의 식습관 및 나트륨 인식 실태’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홍 교사는 무료 수학 학습 누리집인 ‘이비에스매스’(EBSMath)에서 ‘이지통계’ 프로그램을 개발했던 경험을 살려 특별한 통계수업을 하고 있다. 나트륨 프로젝트 외에도 ‘우리학교 맞춤형 미니게임 만들기’, ‘건축공사?재해 발생 유형 통계’ 등 홍 교사의 수업은 ‘실용’, 즉 현실 생활에서 유용한 통계 공부에 맞춰져 있다. 홍 교사 혼자 수업을 하는 건 아니다. 이런 수업은 ‘교과융합형’으로 진행한다. ‘통계조사를 위한 질문지 작성’, ‘주제에 대한 관점 생각해보기’ 등은 철학 과목을 담당하는 윤상철 수석교사가 진행한다.
이 학교 3학년은 진로·진학과 연계한 통계수업도 한다. 신약개발 연구원, 프로그래머, 게임 기획자, 건축공학자…. 학기 초 학생들이 진로·적성 활동지에 적어낸 ‘희망직업’이다. 각자 꿈과 관련한 관심 분야 안에서 통계 주제를 정하면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생명과학 전공을 희망하는 최한비양은 “참고서 속 ‘죽은 수학문제’가 아니라 직접 100여명의 친구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관련 논문을 찾아보는 등 ‘살아있는 통계’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안세민·홍정민양은 “설문 결과를 엑셀로 분석하고 나트륨의 특징과 섭취 기준 등을 생생하게 접하면서 관심 분야인 ‘화학’ 지식을 접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통계를 활용해 ‘맞춤형 미니게임’을 개발하는 그룹도 있다. 컴퓨터공학 및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은 이하임·오은주·김세인양은 “우리 학교 학생 100명에게 ‘게임 캐릭터와 성격, 원하는 게임 장르’에 대한 설문조사·면접을 진행했다”며 “20개 문항을 분석한 결과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의 남자 캐릭터’에 대한 수요가 많아 이를 미니게임으로 구현하기 위해 직접 디자인 및 코딩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반포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래프 분석해요”
이 학교 사례처럼 앞으로는 다른 학교들도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통계 공부를 할 예정이다. 지난 7일 교육부와 통계청(통계교육원)은 “계산 중심 통계 수업이 아닌 생활 속 통계 현상에 대한 비판적 추론 능력을 향상하겠다”는 내용으로 ‘2017 실용 통계교육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표본집단, 확률변수, 정규분포, 분산 등 공식을 암기하는 ‘수리 통계’에서 벗어나 생활 속 통계 현상에 대한 비판적 추론 능력을 기르게 하겠다는 게 골자다. 빅데이터 시대에 정답을 맞히는 식의 통계교육이 더는 의미가 없고, 스스로 주제를 세우고, 결과를 잘 해석해내는 눈이 필요해졌다는 점이 실용 통계교육 등장의 중요한 배경이다.
사실 교육 현장에서 ‘통계’는 20년 경력의 베테랑 수학교사들도 꺼리는 단원이었다. 학생들은 복잡한 수식은 물론이고 온갖 표와 자료를 해석하는 데 큰 부담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통계의 재미와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실용 통계교육 방안을 연구하고 수업 계획안을 공유하자는 뜻에서 4년째 이어지는 교사 모임도 있다. ‘통계교육교사연구회’ 소속 반포고 박지현 교사는 “사실 고교 졸업 뒤 가장 활용도가 높은 수학 분야가 바로 통계”라며 “시시각각 쏟아지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수많은 데이터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려 실용 통계수업을 3년째 해오고 있다”고 했다.
박 교사는 ‘미디어에서 잘못 구현된 막대그래프 찾아보기’, ‘통계를 활용해 다양한 정보 분석해보기’ 등 신문 기사에 게재된 통계 그래프의 오류와 표현상 틀린 점 등을 찾게 하는 수업을 하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 다루는 자료를 분석하고 오류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 ‘아무 생각 없이 뉴스 보기’가 아닌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수업 목표다.
반포고 3학년 유시현양은 “매일 뉴스나 기사에서 각종 그래프를 주장의 근거로 활용한다. 실용 통계수업 이후에는 ‘왜 저 자료를 사용했을까?’, ‘통계청 발표 수치와 막대그래프의 비율은 정확한가?’ 등을 유심히 보게 됐다”고 했다. “김영란법 국회 통과에 대한 찬반 여론조사 결과를 뉴스에서 다룬 적이 있어요. 그때 반대 의견의 실제 수치는 7.3%였는데 원그래프로 구현된 비율이 찬성 64%와 다를 바 없이 보였습니다. 통계 수치를 표현하는 그래프는 시각화된 자료라서 전달력이 높잖아요. 왜곡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았죠.”
박 교사는 “‘방송사 뉴스 프로그램에서 해당 통계 자료를 왜 사용했는지, 실제 수치와 그래프 비율을 비교했을 때 문제는 없는지 등을 찾아 활동지를 만든다”며 “막대·원·띠그래프와 상관도표 등을 이용해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자연스레 익힐 수 있다”고 했다.
3학년 한지원양은 “‘부유한 나라의 국민이 정말 더 오래 살까?’라는 막연한 질문이 생겼다”며 “세계보건기구(WHO)의 ‘세계 보건통계’ 자료를 활용해 국내총생산(GDP), 국민총생산(GNP)과 기대수명 등을 비교해봤다”고 했다. “수명과 국가경제 수준이 통계적으로 꽤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어요. 추상적이지만 궁금했던 ‘나만의 질문’을 수학적인 절차를 활용해 구체화하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필요한 자료를 찾고 분류한 뒤 표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운 통계 용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요.”
과정 중심 통계수업으로 ‘수학 시야’ 넓혀
실용 통계수업을 통해 기사와 뉴스 등 수많은 정보를 선별해서 분석하는 힘도 키울 수 있다. 박 교사는 “빅데이터 시대에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고 유용한 지식으로 전환할 것인지에 대한 이해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며 “실용 통계교육을 해보면 학생들의 자료 수집·정리·해석 능력이 크게 좋아진다. 고교 졸업 뒤 대학에서 과제를 수행할 때 가장 필요한 역량”이라고 했다.
요즘은 중학교에서도 자유학기제를 통한 실용 통계교육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대구 영남중학교 정승호 교사는 “고교 입학 전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는 게 바로 통계교육”이라며 “굳이 딱딱하고 어려운 주제가 아니더라도 아이들 수준에 맞는 질문을 발굴해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다.
“통계는 과정이 중요한 단원이죠. 하나의 주제를 끝까지 끌고 가는 ‘수학적 지구력’을 길러줄 수 있습니다. ‘학교 매점은 몇 시에 판매율이 가장 높을까?’ 등 생활밀착형 프로젝트로 수학에 흥미를 더해줄 수 있는 단원입니다.”
전주교육대학교 수학교육과 고은성 교수는 “기존 통계수업은 질문지가 일방적으로 완성되어 있고 여기에 대한 답을 수동적으로 구하는 방식이었다”며 “실용 통계교육을 통해 주제 선정부터 표본 모집단 고려 등의 방법론을 체득하고 ‘수학 시야’를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주도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주변 현상을 관찰하고 문제의식을 키울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상대방을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방법도 배우게 될 겁니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