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 권지웅 교사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동료교사와 학생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점심 급식을 서둘러 ‘마시다’시피 한 교사와 학생들이 진로활동실에 모였다. 권지웅 과학교사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했다. 25분 남짓한 짧은 시간인데도 짜임새 있고 흥미로운 수업 내용에 학생과 동료 교사들은 몰입했다.
권 교사는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인 테오도르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의 뗏목>을 보여주며 인간의 굶주림과 식량 문제를 끌어냈다. 이후 <인구론>을 쓴 정치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를 거쳐 식량 문제 해결 대안으로 떠오른 비료 이야기를 꺼냈다. 과학과 연계해 비료를 만들 때 필요한 영양소를 설명하고 질소고정법을 만든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만들어 유대인을 죽였다는 얘기를 했다.
“식량을 만들어 전세계 인구를 먹여살리는 동시에 독가스로 사람을 죽였던 그에게 과학은 선일까요, 악일까요? 과학은 선도 악도 아니에요. 인간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여러분도 살면서 선택의 순간에 끊임없이 놓일 텐데, 그때 하버의 이야기를 떠올리길 바라요.”
과학선생님이 심리학 알려줘요
몇해 전부터 창의융합 인재를 기른다는 취지로 인문학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교육부는 올해 ‘생애주기별 인문교육 계획’도 발표했다. 청소년 대상 학교밖 인문학 특강도 늘었지만 학교 안에서 인문학 교육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교사들은 담당 교과 외 따로 품을 들여 수업을 짜야 하고, 학생들은 인문학을 어렵게만 여기기 때문이다.
권 교사와 동료 교사 7명은 4년 전부터 점심시간을 쪼개 인문학 아카데미를 열고 있다. 정보통신(IT) 계열 마이스터고 특성상 소프트웨어와 디자인 계열 분야 수업이 많다. 밤 9시까지 진행하는 방과후 학교도 대부분 전공 위주 프로그램이다. 교사들은 “스티브 잡스 이후로 아이티 계열도 단순히 기술 구현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도 중시한다. 꼭 일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인문학을 접하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민했으면 하는 생각에 시작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날 수업을 들은 3학년 한세빈(컴퓨터 프로그래밍 전공)양은 지난해부터 인문학 아카데미 수업을 듣고 있다. 학교 전공 공부에 치이다 보니 인문학 지식이 많이 부족한 거 같아서다. 그는 “권지웅 선생님의 심리학 수업이 기억에 남는다. 과학교사가 심리학 강의를 한다는 점이 독특했는데 심리학의 역사를 쉽게 설명해줘서 좋았다”고 했다.
“마이스터고 애들은 상대적으로 일찍 사회에 나가게 되니까 미숙하고 어려운 점이 많다. 내 경우 이 시간을 통해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배웠다. 일 잘하는 걸 떠나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할 수 있었다.”
일반 교과 수업은 짜여 있는 교육방식에 따라 한정된 내용을 배운다. 인문학 아카데미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주제를 깊게 고민하고 배울 기회를 준다. 교사들이 정한 주제도 다양하다. 프로그래밍을 담당하는 임정훈 교사는 ‘애플의 프레젠테이션과 철학’, 김지훈 영어교사는 ‘어린 왕자를 통해 바라본 관계론’, 이세호 영어교사는 ‘나의 동양고전 독법’, 디자인을 가르치는 김종성 교사는 ‘서양미술사로 보는 미학’ 등. 담당 교과목과 연계한 경우도 있고, 인문학에만 방점을 찍은 이도 있다.
교사들은 인문학 수업을 위해 일과가 끝난 시간에 따로 공부한다. 일주일 전부터 준비하거나 전날 밤을 꼬박 새울 때도 있다.
2학년 김예진양도 교과서 외 다른 내용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호기심으로 강의를 신청했다. 공자를 주제로 한 첫 강의 때 “심장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은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말이 특히 와닿았다. “수업시간에 배우고 나면 머릿속에 남지 않았는데, 그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지금까지 태도를 반성하고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게 됐다. 인문학이 좀 더 내 삶과 밀접하게 다가온 느낌이었다.”
책 읽고 각양각색 연극으로 풀어내요
서울 신화중은 연극을 활용한 인문학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보통 인문학 수업은 딱딱한 강연을 듣거나 책읽기를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 학교는 책을 읽고 감동받은 내용이나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등을 연극에 담아 전달하는 활동을 한다. 공연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작품을 분석하고 실제 극으로 구현하면서 작품 속 인물은 물론이고, 자신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넓힌다.
문상원 교사는 5년 전부터 학생들의 흥미 유발을 위해 연극 수업을 시작했다. 교사 입장에서도 수사법이나 시적 화자의 의도를 외우는 시 수업은 재미없었다. 아이들은 시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다가 시에 나온 상황을 직접 연극으로 표현하면서 시인의 마음은 어땠을지, 자신의 느낌은 어떤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과 수업과 연극을 접목한 ‘교실연극제’와 특정 책을 골라 학생이 연극으로 재구성하는 ‘독서연극제’를 수시로 연다. 문 교사는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문제를 고민하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의 연극을 보면서 자신이 몰랐던 내용, 다양한 의견도 접하게 된다”고 했다.
연극을 활용한 인문학 교육은 수업 내용을 깊게 이해하도록 하는 동시에 상상력이나 표현력도 길러준다. 지난 4일 찾아간 문 교사의 수업에서 아이들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서 주인공(시적 화자)이 처한 상황을 연극으로 꾸몄다.
모둠별로 진행한 공연에서 아이들은 주인공이 이별하는 이유를 극으로 개성있게 지어냈다. 소품도 다양하게 만들었다. 똑같은 꽃이라도 양손을 얼굴에 대고 ‘사람꽃’을 보여준 모둠이 있는가 하면, 노트 한장에 꽃을 그려 얼굴에 붙이거나 종이를 잘게 찢어 분홍색 형광펜으로 칠한 뒤 바닥에 뿌리고 꽃길을 만든 모둠도 있었다.
연극을 만들 때 아이들은 교과서 작품이나 읽었던 책의 주제, 때로는 인상깊은 지문 등을 뼈대 삼아 대본을 쓴다. <저스트 어 모멘트>(이경화 지음)를 고른 학생들은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학생이 임금을 제대로 못 받는 대목을 뽑아 연극을 만들었고, <완득이>(김려령)를 선택한 학생들은 담임선생님 ‘똥주’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풀어냈다.
지난해 교내 축제뿐 아니라 서울시교육청 학교예술교육 종합페스티벌, 지역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효공연 등 350여명의 학생이 연극 공연에 참여했다. 일상 속 문화예술교육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문 교사는 서울시교육청 문화예술자문위원과 교사연극연구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학생연극제 총감독을 맡고 동료 교사들과 교류하기 위해 교실연극 공개수업도 10여차례나 했다.
그는 취미로 연극을 배운 적이 있다. 하지만 아이들과 연극을 하는 데 전문성보다 교사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했다. “보통 연극을 하려면 전문 강사를 데려오고 의상이나 조명, 음향 등 무대 만드는 데 예산을 많이 쓴다. 겉보기에 그럴싸해 보이지 않더라도 내용에 치중하는 게 낫다. 나는 아이들에게 연기력을 요구하지도, 어떤 틀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최대한 자유롭게 해석하고 표현하도록 둔다.”
실제 아이들은 시 ‘진달래꽃’을 연극으로 표현하면서 내용을 직접적인 장면으로 풀어낼 것인지, 연인의 이별 상황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새로 짜낼 것인지 열띤 토론을 했다. 황애정양은 “원래 알던 시였지만 시에 나온 상황을 직접 표현하며 시인의 마음을 가깝게 느꼈다. 친구들과 의견이 안 맞는 부분을 조정해가는 게 쉽진 않았지만 재밌었다”고 했다.
문 교사는 “내가 처음 무대에 섰을 때 너무 떨려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자꾸 하다 보니 어둠 속의 관객이 눈에 들어왔다”며 “아이들에게 연극도 마찬가지다. 안 보이던 세상이 차차 보이게 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도 하나씩 알려준다. 내용을 ‘읽는 것’은 단순 전달이지만 직접 ‘말하는 것’은 ‘자기표현’이다.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표현을 하며 자신감도 기르고 스스로 성장한다”고 했다. 글·사진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
4일 서울 신화중 문상원 교사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주제로 만든 연극 공연을 하고 있다.
4일 서울 신화중 학생들이 연극 공연을 위해 모둠별로 배역을 나눠 대본을 쓰고 소품도 직접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