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3월12일 삼성동 자택 앞에 모인 지지자들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교사, 숭실대 철학과 겸임교수)
[한겨레 사설] ‘승복과 통합’ 대신 ‘갈등과 대결’ 택한 박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사흘째인 12일 청와대에서 나와 서울 삼성동 옛집으로 돌아갔다. 탄핵이 결정된 3월10일 이후 그는 이미 대통령이 아니었으니 즉시 청와대 관저에서 나왔어야 했다. 뒤늦게라도 청와대를 비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난 이날까지도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았다. 그는 옛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지자들과 친박 정치인들에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악수를 했다. 탄핵 결정을 존중하고 승복한다거나 국민 통합을 당부하는 말은 전혀 없었다. 대변인을 통해 대신 발표한 입장에선 “모든 결과를 안고 가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말해, 헌재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싸우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지만 “믿고 성원해준 국민께 감사한다”고 말해, 온 국민이 아니라 지지층을 향해서만 호소했다. 승복과 통합 대신 갈등과 분열의 싸움을 계속하겠다는 불길한 메시지다. 탄핵당한 대통령의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매우 실망스럽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한때 국가 지도자였다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고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승복과 통합을 밝혀야 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지지자들의 시위가 폭력화해 사람이 죽고 다치는데도 ‘불복’의 메시지로 반발을 ‘선동’하고 지지자들을 계속 끌어모으려 하고 있다. 무책임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헌법 수호의 의지는커녕, 헌정 체제를 부정하고 공격하는 반헌법적 행위다. 헌정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극단으로 치닫는지 짐작 못할 바 아니다. 정치적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혹은 당장 눈앞에 닥친 검찰 수사와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 지지세력을 ‘방파제’로 삼으려는 것이겠다. 나라야 어찌 되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몰염치가 가증스럽다.
그런 시도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박 전 대통령 쪽은 ‘불복’을 거론하지만, 헌재 결정에 불복할 방법은 전혀 없다. 헌재는 단심이고 최종심이어서, 그 결정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종국적 결정이다. 재심 사유가 있을 수도 없거니와, 파면 결정의 중대성과 파장 때문에라도 재심은 허용되지 않는다. 박근혜씨와 그 주변은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야만의 억지가 과연 언제까지 통하겠는가.
[중앙일보 사설] 박근혜의 불복…나라 두 동강 내려는가
헌재 판결에 대한 승복도, 국정 농단 의혹에 대한 최소한의 사과도 없었다. 헌재의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파면되고도 청와대에서 사흘을 버티다 12일 밤 사저로 돌아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는 헌재 결정에 사실상 불복을 시사하고 자유한국당을 접수해 검찰·야권과 대결정치를 하겠다는 결기만 가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저 복귀는 복귀 3시간 전 이 사실을 언론에 흘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소식을 듣고 삼성동 사저 앞에 몰려든 지지자들이 ‘박근혜’ ‘탄핵 불복’을 연호하는 가운데 도착한 박 전 대통령은 시종 미소 띤 표정으로 친박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와 동시에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한국당 민경욱 의원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데 대한 죄송함과 성원해준 국민에 대한 감사를 표한 뒤 “모든 결과를 내가 안고 가겠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 믿는다”는 박 전 대통령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헌재의 탄핵 결정에 노골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면서 지지층을 결집시켜 검찰에 ‘위력 과시’를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수사의 예봉을 꺾겠다는 속내가 드러난다.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난 지 오래인 민 의원을 대변인으로 내세워 입장을 표명하고 친박계 한국당 의원들을 자택 앞에 도열시켰다. 이는 한국당을 직접 접수해 자신을 탄핵시킨 비박계·야권과 대결정치를 벌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헌재 선고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92%가 헌재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고 답했다. 박 전 대통령은 10% 남짓한 지지층을 인질 삼아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며 나라를 두 동강 내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대통령은 국법 수호의 무한책임을 지는 국가 이성의 최고봉이다. 본인이 억울한 측면이 있더라도 헌재의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 지체 없이 승복을 선언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의무다. 나아가 지지층에 자제를 호소하고, 이번 사태로 상처 입은 국민들을 위로해 치유와 화합에 앞장서는 게 전직 국가원수로서 최소한의 도리 아닌가.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과거 발언도 잊어선 안 된다. 2004년 헌재가 세종시 수도 이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곧 헌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헌법에 대한 도전이자 체제에 대한 부정이다”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보다 전국 득표에서 앞선 데다 플로리다주 개표 논란으로 승리를 주장할 여지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부시의 손을 들어준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동의하지 않지만 받아들인다”며 물러났다. 이 퇴임사는 두 쪽으로 쪼개지던 미국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한 결정적 한마디였다.
박 전 대통령이 진정 민심과 역사의 재평가를 받고 싶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헌재의 최종 판단에 승복하면서 검찰 수사에 당당하게 응해야만 한다. 박 전 대통령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이제 헌재의 판결을 차분하게 기다리고, 그 판결에 대해 찬성했던 사람이나 반대했던 사람이나 겸허히 승복해야 한다고 본다”고 촉구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 발언이 자신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돼야 한다는 건 박 전 대통령도 잘 알 것이다. 이제 박 전 대통령은 13년 전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길 일만 남았다.
[추천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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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보는 사설] 국민은 헌법을 만드는 힘의 원천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 근거다. 국민은 그러한 헌법을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다. 재판부는 국민들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이뤄지는 오늘의 선고가….” 이정미 권한대행의 말이다. 민주공화국에서 최고 권력의 주체는 국민이고 모든 힘의 원천도 국민이다. 익히 알고 있는 헌법 제1조의 내용이다. 고귀한 권리이지만 옷장 속의 보석처럼 일이 있을 때나 꺼내보고 다시 집어넣는 추상적 권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대통령을 평화적 절차에 따라 국민의 힘으로 퇴거시킴으로써 국민들은 법치주의와 헌정주의가 아직은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안도했다. 탄핵에 찬성한 80%의 국민은 인간 박근혜나 여자 박근혜를 몰아낸 것이 아니라 대통령 박근혜가 파괴한 헌정 질서를 탄핵으로 복원하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자신 안에 국가주체로서의 힘이 실제로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3월10일, 광장의 촛불은 “이게 나라다”라고 쓴 손팻말로 한 줄 논평을 대신했다. 한편, 친박진영은 촛불 국민을 종북 빨갱이라 불렀고 계엄을 주장하거나 과거의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하는 등 독재정권의 유산을 소환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특검과 헌법재판관들을 조롱하고 위협했으며 기자들을 폭행했다는 점이다. 이번 탄핵 재판 중 벌어진 일들은 헌법 수호 대 헌법 부정, 공화주의 대 배타주의, 민주주의 대 국가주의, 평화주의 대 폭력주의의 여러 대립 양상이 중첩되었다. 자신의 힘을 자각한 국민들의 정치효능감은 대한민국이 시대에 역행하지 않고 정상적인 법치국가로 자리잡는지 늘 감시하고 참여할 것이다.
연재사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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