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독후활동을 책으로 남기기 위해 아이디어를 나누고 있는 영락고 2학년 독서동아리 ’건축학개론’.
10월19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영락고 본관 회의실. 긴 회의실 테이블을 둘러싸고 학생 두 그룹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그룹은 고2 여학생 5명이 <하리하라의 바이오 사이언스>를 진지하게 읽었다. 다른 그룹에 속한 2학년 여학생 6명은 <건축가가 되는 길>을 펼쳐놓고 독후 활동 결과물인 ‘책 만들기’ 과정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놨다.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킥킥 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책을 만드는 데 정해진 틀이 있는 게 아니야. 우리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면 돼.” “그럼 글 쓰는 건 최소화하고 우리가 원하는 건축물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덧붙이면 어때?” “근데 제작사에 책을 맡기면 알아서 만들어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드는 거야. 그래서 모여서 같이 하는 거지. 과정도 자료로 남아 있어야 해.” “책을 3D프린터로 찍어내는 건 어떨까?”(일동 웃음)
독서동아리 ‘건축학개론’ 학생들이 나눈 이야기다. 이들은 건축학도를 꿈꾸는 이과 여고생들답게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놨다. 건축 관련 책을 읽고 토론한 내용을 녹취해 각자 타이핑해서 책으로 만들 계획이다. 그 안에는 1학기 때 읽은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에 나온 건축물을 직접 답사하고 쓴 소감문, 각자 원하는 건축물의 디자인과 설계도도 담을 예정이다. 좋아하는 건축 모형을 팝업북 형태로 넣는 방법도 구상 중이다. 동아리장인 양정빈양은 말했다. “우리 책이니까 우리가 디자인을 구상할 생각입니다. ‘집’을 떠올린다고 해도 누구는 ‘편안한 집’, 누구는 ‘실용적인 집’ 등 각자 다르게 그리기 마련이니까요.”
이 학생들이 책을 읽고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건 학교의 뒷받침 덕이다. 평범한 일반고였던 영락고는 지난해부터 독서를 통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1~3학년까지 총 340명, 전교생의 60%(1학년 65.6%, 2학년 71.8%, 3학년 42%)가 독서동아리에 참여한다. 동아리 지도교사도 23명. 전체 교사의 46%나 된다.
1~2팀의 독서동아리도 유지하는 게 힘들던 학교에서 대규모로 독서동아리가 꾸려진 배경은 뭘까? 학교가 ‘책읽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된 데는 연구부장인 정연 역사교사 공이 컸다. 정 교사는 “평소 수업을 하며 아이들의 어휘력이 날로 떨어져 문제라 느끼고 있었다”며 “어휘력과 동시에 사고력도 확장하는 방안으로 독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마침 대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종합전형에 독서가 진로·동아리·자율활동 등의 항목에서 다 활용될 수 있기에 아이들의 참여를 끌어낼 현실적인 수단이 될 거라 판단했다.
같은 날, <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를 읽고 대체자원과 관련해 열띤 토론중인 1학년 독서동아리 ’소통하는’.
학기 초 ‘10팀만 모여도 좋겠다’는 바람으로 간식비와 활동비 정도 예산만 확보한 채 모집을 시작했다. 한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37개(교사 동아리 3개 포함) 동아리가 신청을 했다. 사전설명회를 통해 아이들한테 대입에서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고, 관악구청 ‘꿈실은 책마을’ 사업으로 독서동아리 운영비 지원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 덕분이다. 아이들이 책읽기의 필요성을 체감한 상황에서 책값과 동아리별로 연간 50만원씩 활동비도 지원해준다니 자발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침독서모임으로 30분 일찍 학교에 나와 주 2회 독서모임을 열었다. 그러나 등교 시간을 앞당긴다는 게 쉽지 않은 일. 지각하는 아이, 책 놓고 오거나 안 읽고 오는 아이가 속출했다. 시행착오를 거쳐 올해는 매주 수요일 8교시에 1시간씩 진행하는 걸로 바꿨다. 일반고에서 정규시간이나 다름없는 8교시를 독서동아리를 위해 비워둔 것이다. 학교의 배려 덕에 학생들은 좀 더 안정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와 비교하면 신청자가 두 배쯤 늘었다. 관련 기관의 예산 지원과 지역 독서활동가들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채 2년이 안 되는 기간 학생들과 교사들은 달라진 게 많다. 한문 담당 최승락 교사는 “지금까지 교직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생은 재밌는 소설책이나 문학책 정도만 관심 있을 거라 생각했다”며 “아이들이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니 다양한 관심 분야에 따라 스스로 대학교 개론서 수준의 책을 찾아 읽고, 토론·토의를 했다. 이 친구들이 이렇게 깨어 있구나 느껴지더라”고 전했다. 덕분에 최 교사도 기존의 지식 전달, 강의 중심 수업 방법을 토론·발표 중심으로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생각할 시간과 참여 기회를 더 늘려주기 위해서다.
1학년 최지혁군은 독서동아리를 통해 자신의 꿈을 발견한 사례다. 현재 ‘B더쿠’ 동아리장인 최군은 중학교 때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중학교 ‘도서부’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는 “중학교 때 책이 친구들과 연결해주는 통로였다면, 지금의 책은 ‘국어교사’라는 꿈을 구체화해줬다”고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며 다양한 문학·비문학 책을 읽고 이 내용을 다른 친구들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최군처럼 진로 탐색에 도움을 받은 학생도 있지만 책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거나 이해력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올해 수시원서를 쓴 3학년 수험생들한테 학교 독서동아리는 더 귀중한 경험이다. 심리학 전공을 꿈꾸는 3학년 이창현군은 동아리 친구들과 <긍정의 힘>,<긍정의 배신>을 번갈아 읽으며 ‘긍정’과 ‘걱정’에 대해 고민해보고, 현대인이 걱정을 해소할 통로로 ‘걱정인형’(털실과 종이로 만든 과테말라 전통인형으로 ‘걱정인형에게 걱정을 털어놓으면 사라진다’는 의미가 있다) 캠페인을 벌였다. 반응이 좋아 관악구 대표로 서울시청에서 열린 혁신교육박람회에까지 나갔다.
같은 학년 김경일군은 동아리에서 읽었던 <뉴미디어와 정보사회>라는 책 이야기를 자기소개서에 적었다.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읽고 열심히 토론했던 책이라 관련 질문이 실제 수시 면접에서 나왔을 때 긴장하지 않고 답변할 수 있었다.
영락고도 대부분의 일반고와 마찬가지로 상위권 학생들이 특목자사고나 교육특구로 빠져나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교내 독서동아리가 활성화되면서 주변 학부모들에게도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교육에 관심 있는 초중생 학부모들이 지역 인근 학교로 진학을 고민하는 상황이다.
지도교사들은 “일반고라는 이유로 기죽어 있던 아이들이 독서동아리를 하면서 꼴등 하는 아이도 기 펴고 함께 앉아 책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진로를 찾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글·사진
이은애 <함께하는 교육> 기자 dmsdo@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