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와 학생들이 ‘학생들이 바라보는 자유전공학부의 미래와 희망'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대 제공
14학번 김근영씨는 정보문화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 정보문화학과는 언론·디자인·컴퓨터공학을 합쳐 만든 연합전공이다. “영상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어서 다양한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고교 때는 (전공 탐색이라고 한 게) 영화잡지를 사 보고 간단한 영상이나 게임을 만들어보는 정도였다.”
김씨는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해 일년 동안 여러 가지 강의를 들으며 전공 탐색을 했다. 처음에는 언론정보학과나 심리학과를 생각했는데 지금 전공이 좀더 맞다고 생각해 선택했다. 이론과 실습 둘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는 “1학년 때 세부 전공을 고민하면서 고교 때 학과를 결정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다. 고3 때는 보통 학과 이름만 보고 대충 뭘 배우는구나 짐작하거나 인기가 얼마나 있는지 등을 따졌다. 지금 전공하는 인류학도 대학에 와서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자유(자율)전공학부(이하 자전)는 1학년 때 원하는 강의를 듣고 2학년 이후에 세부 전공을 선택하는 학과다. 대부분 의대나 치대, 간호대, 사범대 등 졸업 뒤 ‘자격’이 주어지는 특수학과를 제외하고 원하는 학과로 진입할 수 있다.
관심 분야 전공 탐색 후 교육과정 직접 짜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국 33개 대학에서 자전을 운영 중이다.(표 참고) 대학마다 모집이나 운영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보통 인문·자연계열을 나눠서 선발하는 곳과 계열 상관없이 통합선발하는 곳으로 나뉜다. 일부 대학은 세부 전공학과를 선택할 때 성적을 따지거나 인원 제한을 두기도 한다. 계열을 나눠서 학생을 모집한 경우 해당 계열 내에서만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서울대 자전은 학생들이 세부 전공을 직접 설계한다. 기존 학과를 하나 선택하고 나머지 학과는 직접 세부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다. 지도교수도 직접 정한다. 실제 한 학생은 법학·사회학·심리학·통계학 등 다양한 전공을 합쳐 범죄학 교육과정을 새롭게 만들었다. 졸업할 때 범죄학과와 다른 하나의 학과 전공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된다.
김씨는 “일단 수업을 들어보고 전공을 결정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1학년 때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많이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며 “세부 전공 진입 뒤 과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다는 건 아쉽다. 다른 과에 비해 소속감이 덜하다”고 했다.
한동대 신입생들은 모두 글로벌리더십학부로 입학해 관심 있는 학과의 강의를 듣고 2학년 때 세부 전공을 두 개 선택한다. 모든 학생이 자전으로 입학하는 셈이다. 이 가운데 서울대 자전과 비슷한 학생설계융합전공은 기존 학과 한 개와 관심 있는 분야의 전공을 합쳐 전공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다. 기계와 경제 분야, 법학과 전산학 등 다른 분야 과목을 하나의 커리큘럼에 넣을 수 있다. 졸업할 때 자신이 선택하거나 설계한 세부 전공 분야의 학사 학위 두 개를 받게 된다.
이 학교 관계자는 “학생이 두 가지 세부 전공을 선택하는데 복수 전공처럼 따로 학점이나 인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적성에 안 맞으면 6학기 전에 전공 취소도 가능하다”며 “학생 입장에서는 귀찮을 수 있지만 공부하는 목적을 좀더 고민하고 원하는 분야를 선택해서 듣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가 확실하다”고 했다.
학생설계융합전공을 공부하는 신석환씨는 경영과 상담심리 쪽 수업을 듣다 3학년 1학기 때 경영학 대신 뇌인지과학으로 세부 전공을 변경했다. 상담 공부를 하면서 사람을 이해할 때 심리적 측면만 볼 게 아니라 생물학적 면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상담심리학과 함께 전산 쪽 기초 프로그래밍과 생물학, 데이터 분석 관련 강의를 선택했고 뇌과학에 관련한 수업은 개설된 게 없어서 인터넷 강의 ‘무크’에서 찾아 신청했다.”
학교에 없는 수업을 외부에서 들을 경우 학점 인정도 해준다. 그는 주변에서 정보를 구해 만든 강의 목록을 가지고 지도교수와 상담한 뒤 공부할 과목을 결정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듣는 수업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설계해서 시간표를 만드니 더 열의를 갖고 공부하게 된다.”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이 전공박람회에서 일반학과 선배들에게 세부 전공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서울대 제공
뚜렷한 전공적합성보다 다양한 잠재력 보여줘야
자전을 운영하는 학교는 보통 학기 초 설명회를 열어 전공 설계에 대해 알려주고 전공별 개론 수업에서 전공에 대한 정보를 준다. 학과 차원에서 전공박람회를 열거나 학생이 원하면 특정 학과 교수나 선배를 멘토로 연결해 전공 선택에 도움을 주는 곳도 있다.
자전 학생들은 “3학년에 올라가도 세부 전공 진입을 못 하는 사람도 있고 커리큘럼이 워낙 빡빡해 4년 뒤 바로 졸업은 사실상 힘들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전공 탐색을 알아서 도와주기만 기다리기보다 관심 있는 분야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대교협 입시상담센터 상담가는 “자전은 학점 관리만 잘하면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서 중상위권 대학은 경쟁률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자전은 인문계열에서 경영과 경제학과 다음인 통계학과와 비슷한 정도다. 경희대 자전의 경우 로스쿨이나 행정고시, 공인회계사 등을 준비하는 트랙으로 운영하니 잘 알아보고 선택해라.”
실제 경희대는 자전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로벌리더와 글로벌비즈니스 과정을 운영한다. 1학년 때 30학점을 이수하면 성적과 상관없이 이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다른 학과 지원도 가능하다. 학과 관계자는 “글로벌리더는 법대가 폐지된 뒤 만들어진 과정이고 글로벌비즈니스는 경영학부 교육과정을 기반으로 국제경영 쪽을 중점적으로 다룬다”며 “커리큘럼이 행정고시나 외무고시, 로스쿨에 가려는 학생을 대상으로 시험 대비 과목으로 짜여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를 포함한 일부 대학에서는 전공 쏠림과 학과 개편 등을 이유로 자전을 만들었다가 폐지하기도 했다. 지방 사립대 자유전공학부에 재학 중인 정아무개씨는 “경찰행정학과나 경영학과 등 인기 학과는 성적을 따진다. 그래도 수능 성적이 안 좋은 애들은 상대적으로 점수가 높은 과에 가려고 이 학과를 선택하기도 한다”며 “세부 전공을 선택한 뒤 그 학과에서 어울리기가 쉽지 않고 같은 점수를 받아도 그 학과 학생을 먼저 챙기거나 자전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차라리 학생을 선발할 때부터 수능 합격선을 높이는 게 낫다”고 했다.
남윤곤 메가스터디 입시전략연구소장은 “서울대를 제외하고 예전보다 자전이 갖는 메리트가 사라졌다”며 “문과에서는 아이들이 경제나 경영학과에 가기 어려울 때 우회 전략으로 가는 학과로 생각한다. 하지만 특정 학과로 몰릴 경우 정원 때문에 성적 커트를 두고 개별적으로 면접을 보는 학과도 있다. 학과 자체의 취지는 좋지만 학생들이 원하는 학과를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자전을 가고 싶은 수험생들은 학과 자체가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않아서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한다. 고등학교 때 이과였던 황운중씨는 지금 서울대 자전에서 인문계열의 미학과 미대 조소과의 영상매체예술을 전공 중이다.
“입시 때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만 드러내는 건 오히려 마이너스다. 이것저것 경험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었다거나 문·이과 계열에 대한 관심을 고루 어필하는 게 좋다. 자전은 그릇에 물이 얼마나 차 있느냐를 보는 게 아니라 얼마나 그릇이 큰지를 본다. 그릇은 크되 물이 안 차 있다는 건 멍청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와 잠재력을 뜻한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