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광명고 인문학 동아리 ‘광명희망’ 학생들이 자신들이 쓴 책 <고교생 이솝우화를 다시 보다>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부산 광명고 제공
“책 쓰기는 하나의 장기 프로젝트죠. 힘든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마무리해본 경험은 다른 것에서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줘요. 한 번이라도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해본 경험은 다른 활동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올해 서울대 통계학과에 입학한 장형우씨의 말이다. 장씨는 고등학교 때 교내 동아리 활동을 통해 2권의 책을 낸 학생 저자이다.
대입 학생부종합전형과 고입 자기주도학습전형의 영향으로 교내 동아리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몇몇 교육특구에서 연구 활동을 정리한 개별 출판이 붐을 이룬 적은 있지만, 최근에는 교내 동아리 차원에서 교육부나 학교 지원을 받아 실제 출판(서점에서 판매가 가능한 책)까지 하는 양상이다. 학생들이 안 그래도 벅찬 동아리 활동에 전문 작가들도 힘들어한다는 책쓰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 ‘책 쓰기’ 목적으로 동아리 꾸리다
책쓰기 동아리의 가장 큰 조력자는 지도교사다. 최종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아이들을 독려하고 힘든 탈고와 최종 출판까지 3~4개월 동안 교정교열 과정을 총괄하는 것도 모두 이들의 몫이다. 책쓰기 동아리는 크게 처음부터 책을 쓰기 위해 만들어진 동아리와 인문학 동아리나 독서토론 동아리로 시작해 책 쓰기까지 확대된 동아리로 나눠볼 수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대부분이다.
부산 광명고 인문학 동아리 ‘광명희망’은 전자에 속한다. 지도교사인 최선길 교사는 “퇴직을 10년 남기고 1년에 한 권씩 아이들에게 총 10권의 선물을 남겨주기 위해서 동아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전에 <동양고전 장자에서 길을 찾다>, <고교생이 사기열전을 만나다>를 출간하며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탄생한 책이 <고교생 이솝우화를 다시 보다>다. 이 책으로 2015년 교육부 학생 책쓰기 동아리 중 우수 동아리에 뽑혀 정식 출판까지 하게 됐다.
이 책은 <이솝우화>를 정치, 경제, 교육 등 다양한 관점에서 재해석한 글을 담고 있다. 무뚝뚝한 남고생들을 데리고 글을 쓰게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무작정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먼저 <이솝우화>를 2화씩 나눠 담당을 정해 읽게 했다. 최 교사는 “이솝우화는 분량이 짧아 접근이 쉽고, 읽는 이마다 느끼는 교훈이 다 다르다. 각각의 분량을 정해주면 아이들이 맡은 우화를 여러 번 반복해 읽고, 깊게 생각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책을 읽은 뒤에는 토론이 이어졌다. 담당교사는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동아리장 주도로 대립식 토론이 아닌 하브루타(유대인들의 질문 대화로 이루어진 토론법), 액션러닝 기법(팀을 구성해 각자 자신의 과제나 팀 전체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는 문제 해결 과정) 등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했다.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3시간씩, 각자 담당한 부분을 먼저 발표한 뒤에 동아리 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동아리장인 2학년 고윤재군은 “경제에 관심 있어 우화 ‘갈까마귀와 비둘기들’을 ‘경제학 독점’에 비유해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1학년이라 경제 과목을 안 배웠는데, 2학년 선배들의 조언이 도움됐어요. 30명의 시각으로 내 글을 파악할 수 있어 내용이 더 풍부해졌습니다. 책과 논문을 찾아보며 사례를 추가하고 토론을 통해 글을 다듬었어요.” 글은 A4 2장 분량으로 시작해 한 우화당 4~5장이 될 때까지 사례와 그래프 등 자료를 덧붙여나갔다.
동래여중 동아리 ‘귀를 기울이면’ 학생들. 부산 동래여중 제공
■ 인문학 동아리가 학생저자 낳기도
동래여중 인문학 동아리 ‘귀를 기울이면’은 김성현 지도교사가 교내 인문학 강의를 다른 이들에게도 알리고자 2012년부터 시작한 작업이, 아이들 주도의 인문학적 활동을 담은 책 쓰기로 확대된 경우다. 고등학교와 달리 중학교 인문학 동아리는 학생 모집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교사는 “아이들이 좀더 쉽고 재밌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일상을 여행하는 느낌으로 1년을 살아보자’며 활동을 구성했다”고 전했다.
지역 공정여행가 ‘만효’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여행의 의미를 생각하는 ’지도만들기 워크숍’부터 진행했다. 여행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때쯤 <하이킹 걸즈> 등 관련 책들을 읽고 저자와의 만남, 여행 주제 인문학 특강으로 생각을 확장할 수 있게 도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아이들에게 여행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체험할 기회를 줬다. 학생들은 학교 안 역사적 건물과 부산의 숨겨진 명소를 찾으며 느낀 점을 각자 글로 정리해 카페에 올렸다.
쓴 글을 놓고 토론하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아이들이 손수 삽화와 사진 작업도 병행했다. 이렇게 탄생한 책 <여우들의 히치하이킹>으로 지난해 책쓰기 우수 동아리로 선정됐다. 교육청과 연계된 출판사와 계약할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의 작업물을 최대한 살리고픈 마음에 담당교사는 직접 발품을 팔아 지역 1인 출판디자이너를 섭외했다. 김 교사는 “돌아보면 교사나 아이들이나 서로 신나서 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했을 일”이라고 했다.
동아리장인 3학년 차수연양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여행, 말하고 글 쓰는 것에 대한 편견이 많이 깨졌다”며 “글은 딱딱하고 어른들이 써야 멋져 보인다 생각했는데, 나와 친구들이 자신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쓴 글이 어른들이 쓴 글에 비해 읽기 편하고 친근해 이해와 공감이 더 잘됐다”고 했다.
■ 성적 향상, 자소서·면접에도 도움 줘
동아리 활동은 입시에서 자주 활용되는 단골 소재. 하지만 책쓰기 동아리는 좀 특별하다. 학생들은 “동아리 특징상 심층독서 뒤 토론→자료탐색→글쓰기에 열중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적도 오르고, 자소서·면접 등에도 도움을 받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고군 역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실제 모의고사 성적도 오른 경우다. 1학년 때 국어영역이 4등급이었는데, 동아리 활동을 하며 지금은 1등급이 됐다. 사탐도 마찬가지다. 책을 쓰기 위해 관심 분야를 찾아보고 공부했던 게, 과제 연구에서도 빛을 발해 관련 교내대회에서도 은상을 탔다. 고군은 “동아리 친구들이 각종 교내대회 수상 명단에 항상 껴 있는 걸 보면, 동아리에서 했던 활동들이 공부나 입시와 다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장씨도 “고3 1학기까지 동아리 활동을 해서 부담은 됐지만, 상대적으로 그만큼 수시 서류 작성할 때 시간이 많이 줄었다”며 “두 번의 책쓰기 과정과 동아리 독서토론활동으로 서울대 자소서 3번 인성항목과 4번 독서항목 작성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고 했다. 서류기반 면접에서도 “자신의 전공 관련 활동이 주류를 이루는 이과 학생들의 특성상 인문학 독서토론동아리와 책을 쓴 이력은 특이한 편이라 면접관들이 그걸 많이 물었다”며 “인문학 책과 사회풍자 소설들을 읽으며 전공(통계)에 대해 고민했던 흔적이 나만의 차별화가 됐다”고 말했다.
이은애 <함께하는 교육> 기자
dmsdo@hanedui.com
책쓰기 동아리 지원사업2014년부터 시작된 교육부 전국 학생 독서·책쓰기 동아리는 국가시책사업인 독서교육 진흥사업의 하나로 매년 연초에 신청을 받아 선정한다. 첫해 212팀(2560명), 2015년 211팀(2845명), 올해는 142팀(1680명)이 선정되어 진행 중이다. 선정되면 동아리 운영비를 지원받을 수 있고, 작년부터는 선정된 동아리 가운데 추천된 25팀의 우수 동아리에 300만원가량의 출판비를 추가로 지원했다. 올해도 20팀가량 지원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