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임시총회 및 살인기업 규탄대회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병원 교육관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가습기 사균제 제조 판매 기업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김보일(배문고 국어교사)
[한겨레 사설] 가습기 살균제, 정부 책임도 수사해야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이 4일 제조업체인 옥시로부터 뒷돈을 받고 유리한 실험보고서를 써준 혐의로 서울대 교수를 긴급체포했다. 연구자의 행태도 놀랍지만, 역학조사 결과를 뒤집겠다고 뇌물도 서슴지 않은 기업의 비윤리적 행동에 거듭 아연하게 된다. 엄히 조사해 마땅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피해의 책임이 기업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의 안이한 대처도 피해 발생과 확산의 큰 원인이라고 봐야 한다. 응당 해야 할 예방조처를 하지 않고, 피해 발생 뒤에도 본격 수사와 피해 구제를 미루고, 책임을 서로 떠넘긴 것이 바로 정부다. 직무 태만인지, 아니면 기업의 접근 따위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초동 조처부터 실패했다. 2006년 첫 어린이 사망자가 보고된 뒤 2007년 여러 대학병원 의료진이 관심을 촉구하는 등 비슷한 사례가 잇따랐지만 질병관리본부는 소관 탓만 하며 손을 놓고 있었다. 감염병이 아니라면 유해 화학물질 노출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고 폐 섬유화 등 의심할 만한 증상이 있었는데도 2011년 이전까지는 역학조사도 하지 않았다.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4~5년을 그냥 흘려보낸 셈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에 쓰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은 “2003년 무렵에는 유독물질에 해당할 정도의 강한 독성을 가진 물질이란 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정부 스스로 인정했던 위험물질이었다. 그런데도 1996년 이 물질이 처음 생산됐을 당시 정부는 유해물질이 아니라고 분류했다. 2001년 옥시가 이 물질을 원료로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를 출시했을 때도 안전 인증이나 검사는 없었다. 옥시가 ‘인체에 무해하다’고 광고할 때도 아무런 확인을 하지 않았다. 10년 뒤인 2011년 환경부 역학조사로 PHMG 등이 폐 손상의 원인으로 밝혀졌지만, 정부가 이를 유해물질로 지정한 것은 2014년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관리·감독을 외면한 이유가 무엇인지, 업체에 독성검사 자료 제출조차 요구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피해 확인 뒤 신속한 조처를 미적댄 이유가 무엇인지 등은 지금이라도 규명돼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밝히는 일은 제조사에 대한 수사 못지않게 중요하다.
[중앙일보 사설]생활화학물질을 안전하게 쓸 수 있는 나라인가
임산부와 영·유아 등 143명이 폐 손상으로 숨진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생활화학물질의 안전성 문제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번 사건은 과학적으로 볼 때 ‘살생물제(Biocide)에 의한 공중보건 위기’에 해당한다. 살생물제는 생활환경에서 인간이 원치 않는 미생물·곤충 등을 제거하는 생활화학물질이다. 위생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선 필수품이다. 생활화학물질의 30% 정도를 살생물제가 차지하는 이유다.
살생물제는 저농도로 사용되지만 인체에 직접 노출되는 데다 노출 빈도가 잦다. 이에 따라 직업병을 일으킬 수 있는 산업용 유독물질 못지않게 엄격하게 관리돼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인체에 대한 안전성이 완전히 확인되지 않은 물질도 시중에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는 점이다. 보다 위생적으로 생활하려고 사용한 가습기소독제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 이번 사건도 이런 허술한 관리에서 벌어진 인재였다고 볼 수 있다. 바닥 청소에 쓰는 살생물제를 안전성 확인도 없이 가습기소독제로 전용하다 폐에 문제를 일으켜 결국 끔찍한 참사가 벌어진 게 아닌가.
따라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살생물제를 비롯한 생활화학물질 전반에 대한 안전성 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우선 위해 우려가 있거나 안전성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는 생활화학물질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증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 안전성이 확립되지 않은 물질은 확인이 완료될 때까지 시장 진입을 막는 등 생활화학물질 안전을 확보할 범정부 차원의 종합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 국내에 살생물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법적·제도적 생활화학 안전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럽연합(EU)의 경우 이런 문제점을 일찌감치 간파해 1998년 2월 ‘살생물제 관리지침’을 도입해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거나 신고되지 않은 물질을 포함한 살생물제품을 시장에서 퇴출했다. 모든 살생물질은 인체 및 환경에 대한 영향을 확인한 뒤 당국의 허가를 받아 사용하도록 했다. 2013년부터는 살생물제관리법을 발효해 발암성·생식독성·잔류성·생물농축성 등 인체나 환경에 유해 가능성이 있는 물질은 생산과 유통 자체를 아예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질환을 환경성 질환으로 지정하는 정도의 내용만 입법예고됐을 뿐이다. 살생물제를 법적·제도적으로 적극 관리해 국민의 생활안전을 높일 수 있는 관련 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화학물질 등록법 및 평가에 관한 법률’에 일부 살생물제만 제한적으로 관리대상에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국민이 생활화학물질을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으려면 별도의 ‘살생물제관리법’이 절실하다. 가습기살균제와 유사한 사건을 근본적으로 막으려면 살생물제를 체계적으로 관리해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법부터 신속히 만들어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모두 나서야 한다. 살생물제로부터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원혼을 달래 주는 일이기도 하다.
[추천 도서]
[키워드로 보는 사설]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집단적 소비자 피해의 구제를 위해 ‘소비자 집단소송제도’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시스템을 정비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집단소송제도는 공통의 원인으로 피해를 입은 다수의 소비자를 대표하는 자나 소비자단체 등이 소송을 수행해 판결이 확정되면 그 효력이 소송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에게도 미치는 특수한 민사소송제도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악의적이고 반사회적 기업에 대하여는 실제 손해액의 몇 배를 배상토록 하는 제도다. 실제로 최근 미국 미주리주 연방법원은 제품이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며 난소암 환자와 유가족에게 620억원의 징벌적 성격의 금액을 물어줘야 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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