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경기도 안산 안산대학교에서 열린 ‘2015 전국 토론교육 페스티벌’에서 강연 토크 시간에 김태현 세무사가 자신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 학생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걸 굉장히 부끄러워한다. 또 교사가 가르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해 무조건 받아들인다.”
일본 조시세이가쿠인(성학원)중고등학교 지쿠다 슈이치 교사가 말했다. 그는 20년 동안 토론수업과 토론동아리를 이끌고 올해 일본전국토론대회 중학교 부문 최우수 지도자상을 수상했다. 지쿠다 교사는 학생이 자기 의견을 명확히 이야기하고 교사가 토론수업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동료 교사들과 ‘시나리오 토론법’을 만들었다.
디베이트·하브루타 등
학교 현장 토론교육 바람
기법 설명·자료조사로 시간 부족
제대로 진행 어려워지기도
‘2015 전국 토론교육 페스티벌’서
일본 ‘시나리오 토론’ 등 소개해
방법론 얽매이기보다는
‘내 생각’ 펼쳐보게 도와주기
“우리는 이 방식을 ‘마이크로 디베이트’라고 부른다. 3명이 한팀으로 찬성, 반대, 판정단을 돌아가면서 맡으며 토론한다. 한 학생이 모든 역할을 다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토론의 흐름이나 해당 논제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지쿠다 교사의 말이다.
이때 토론은 교사가 미리 작성한 시나리오대로 진행한다. 토론자는 교사가 나눠준 플로시트(토론의 진행 흐름에 따라 입론과 근거, 반론 등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정리해놓은 것)의 내용을 보고 이야기한다. 같은 시나리오라도 읽는 속도나 말투에 따라 판정이 달라질 수 있다.
시나리오 토론의 장점은 모든 학생이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말을 잘 못하는 학생도 작성된 시나리오를 보고 토론 과정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지쿠다 교사는 “실제로 한번도 발표를 안 했던 학생도 흥미로워하며 토론에 참여한 뒤 다른 수업 때도 자신감 있게 의견을 말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아이들은 자료를 찾으며 자신의 의견을 추가해 새로운 플로시트를 작성한다.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일명 ‘개(改) 시나리오 단계’다. 똑같은 논제에 대해 좀 더 심화된 토론을 진행하는 셈이다. 지쿠다 교사가 속한 ‘교실토론연맹’은 논제별 시나리오를 정리한 <중·고교 토론수업>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을 활용해 토론기법을 잘 모르는 교사도 쉽게 토론수업을 시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 기법을 적용한 ‘토론 고시엔’(갑자원·일본 전국토론대회)도 매년 열린다.
같은날 수업사례 발표 자리서 일본 조시성학원중고등학교 지쿠다 슈이치 교사가 시나리오 토론법을 설명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디베이트, 하브루타 등 토론 기법을 다룬 서적이나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학생들은 토론을 준비하며 다양한 지식을 쌓고 나와 다른 의견을 귀담아들으며 의사소통 능력도 기를 수 있다. 토론교육은 성숙한 민주시민을 육성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교사들이 실제 토론식 수업을 진행하기란 쉽지 않다. 모든 아이들에게 구체적인 토론기법을 이해시키고, 짧은 시간에 제대로 된 토론을 하는 것도 무리다.
지난 21일 안산대(경기도 안산 소재)에서 ‘2015 전국 토론교육 페스티벌’이 열렸다. 현직교사들이 꾸린 경기도중등토론교육연구회에서 주최한 이 행사에 320여명의 교사가 참여해 전문가 강연을 듣고 토론교육 사례를 나눴다. 지쿠다 교사는 이날 그동안 진행해온 시나리오 토론법을 소개했다.
일반적으로 교사가 토론수업을 할 때 대표토론 방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3명의 학생이 각각 찬성, 반대 입장의 팀을 꾸리고 나머지는 판정단이나 청중 역할을 하는 식이다. 이날 참여한 하수정 교사(안산 원일중)는 “대표토론을 진행하다 보면 수업에 소외되거나 반대로 수업을 방관하는 학생들이 생긴다”며 “모든 아이들이 토론에 참여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전체토론’을 적용해봤다. 전체토론은 지쿠다 교사의 시나리오 토론법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하 교사가 진행하는 전체토론 방식의 수업에서는 네 명이 한 모둠으로 각각 찬성·반대·사회자·판정단 역할을 맡는다. 동시에 한 주제로 모둠별 토론을 하기 때문에 모든 학생이 참여할 수 있다. 이때 교사는 모둠을 돌아다니면서 질문에 대한 답변도 해주고 제대로 진행하는지 확인한다.
토론수업을 할 때 교사들은 토론 기법을 설명하고 학생들에게 자료 찾는 시간을 주느라 시간에 쫓긴다. 그렇다 보니 정작 제대로 된 토론은 10~15분밖에 하지 못한다. 하 교사는 이런 상황을 고려해 토론을 하기 전 시간에 ‘기본 논증 만들기’ 수업을 진행한다. 실제 토론을 진행할 때도 기법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다. 그림책을 활용해 아이들이 기본적 지식 없이도 바로 찬반 의견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는 “가령, 피터 레이놀즈의 <점>이란 책을 보며 ‘과연 점(점 하나를 찍은 그림)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을 읽고 ‘엄마의 가출은 정당한가?’를 주제로 이야기한다”며 “어렵지 않은 주제라 아이들이 편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자연스레 토론 기술을 익힐 수 있다”고 말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지쿠다 교사를 만나서 반가웠다. 좀 더 많은 논의를 해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쉬운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 토론은 아이들이 실생활에서 접하는 문제를 대화식으로 해결해나가는 ‘재밌는 도구’다.” 보통 디베이트 수업이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들은 “학생들이 디베이트 하는 모습을 보면 자칫 ‘말발 싸움’처럼 보일 때가 있다”며 “논제와 관련한 자료를 많이 알아온 뒤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식”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연토크 토론자로 참여한 김태현 미국 세무사는 “토론은 말을 잘하거나 자료를 잘 정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토론을 할 때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말하며 방향(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주입식 교육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중·고교 시절은 아이들이 정체성을 찾아가고 확립해나가는 시기다. 하지만 한국의 학생들은 문제가 생기면 직접 해결하기보다 학원부터 가려고 한다. 직장에서도 동료들과 일을 하다 보면 자기 의견을 말하기보다 무조건 수긍하는 식이다.” 김씨는 고교 시절 선택교과로 토론수업을 들었다. 처음에는 영어도 서투른데다 논쟁까지 하려니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지만 나중에는 대회에 나갈 정도로 토론을 즐기게 됐다. 그가 주로 했던 ‘링컨 더글러스 디베이트’는 디베이트 방식 중 하나로 철학적 논제를 주로 다룬다. 가령 안락사, 동성애, 어퍼머티브 액션(미국의 소수자 보호정책) 등이다. 김씨는 “토론을 꾸준히 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넓어지고 가치관도 생기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교사가 토론을 준비할 때 가장 많이, 여러 번 강조한 것이 ‘네 생각을 가져라, 먼저 정체성을 갖춰라’였다. 논제 자체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찬반 논증을 잘 세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하면 어떤 주제가 나와도 자신의 논리를 세워 막힘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안산/글·사진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기자 lotus57@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