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 생각하는 명절이란
고교생들에게 명절은 연휴가 아니다. 3학년은 수능 준비로, 1·2학년은 다가오는 중간고사로 분주하다. 사진은 서울 대치동 학원가의 고교생들. 한겨레 자료사진
추석연휴 ‘나홀로’ 고교생 많아
100명중 30명 명절 당일 학원행
‘반에서 몇 등?’ ‘키 좀 커라’ 등
듣기 싫은 말 안했으면
‘상위권 대학 써야 추석 때 체면 선다’
수시철 반영한 씁쓸한 농담도 돌아 “어느 순간부터는 기차표를 예매할 때도 제 의사는 묻지 않으셨어요. 친척들도 고등학생이면 으레 안 나오는구나,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어릴 때도 고등학교 사촌 언니오빠들을 본 기억은 없거든요.” 유양은 이번 추석에는 부모님 없는 집에서 1박2일을 보낼 예정이다. 다니던 독서실도 추석 당일은 쉰다. 명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유양은 “좋다 마는 거요” 하고 답한 뒤 피식 웃었다. “아무도 없는 집은 공기가 달라요. 아무도 없어서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하고 티브이 보고 싶을 때 티브이도 볼 수 있어요. 대신 학원도 가고 숙제도 해야 해서 자유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에요. 부모님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서울에 오시고요.” 고등학교 3학년 김아무개군은 “친척집에서 내내 명절을 보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집에서는 못하는 컴퓨터 게임도 친척집의 컴퓨터로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까닭이다. “집에서는 눈치도 보이고 잔소리도 들어야 하는데, 명절은 그런 게 없어요.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얘기하고, 사촌들끼리도 별로 할 말이 없어요. 아무도 얘기다운 얘기를 안하니까 오히려 눈치 안 보고 게임해서 좋아요.” “추석에도 공부할 양 많아요” 청소년에게 명절은 더 이상 밀린 담소를 나누고 함께 음식을 먹으며 가족간 정을 나누는 날이 아니다. 지난 9월11일부터 13일까지 기자는 고교생 100명을 대상으로 다가오는 추석 명절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명절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이라는 질문에 고교생들은 ‘쉬는 날’, ‘친척들 보는 날’ 등이라고 답했다. ‘반쪽 자유’, ‘은밀한 자유’, ‘억압의 상징’, ‘돈줄’, ‘최후의 만찬’ 등 독특한 답변도 많았다. ‘반쪽 자유’나 ‘은밀한 자유’는 집에 혼자 남아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 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공부할 양이 많아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억압의 상징’은 명절에도 학원에서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느끼는 답답함을 담은 말이다. ‘최후의 만찬’에는 명절에 맛있는 음식을 먹지만 머지않아 시험기간이 다가온다는 긴장이 담겨 있다. ‘평소 명절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나요?’라는 질문에 ‘부모님 계시지 않는 집에서 공부를 하거나 학원 특강에 참가한다’고 답한 학생이 15%, ‘명절 당일에 친척들끼리 모여 식사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독서실에 가거나 특강에 간다’고 답한 학생이 30%였다. ‘연휴 내내 친척들과 함께 끈끈한 가족의 정을 나눈다’고 말한 학생이 55%로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이들 가운데 절반은 ‘친척들과 모인 연휴의 장점’으로 ‘짭짤한 용돈’을 꼽았다. 흔히 연휴의 장점으로 꼽는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의 수다’나 ‘민속놀이’를 택한 학생들은 전체 설문에 참가한 100명 가운데 10명 정도였다. 성적·일 얘기 등 자제했으면 청소년들은 명절 때 성적 관련 질문을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74%의 학생들이 ‘명절에 가장 듣기 싫은 말’로 ‘반에서 몇 등 하니?’를, 85%의 학생들이 ‘목표 대학은 정했니?’를 꼽았다.(중복응답 가능) ‘살쪘네’, ‘키 좀 커라’ 등 외모 관련 질문이 그 뒤를 이었다. 취업을 앞둔 특성화고교 학생들이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를 반영하듯 ‘취직 어디로 하니?’라는 질문이 청소년들에게도 명절 스트레스 요인으로 등장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이아무개군은 “이런 질문을 하는 어른들이 이해도 가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 힘든 말들”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어른들이 성적을 왜 물어보시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에요. 그냥 친근함의 표현이기도 하고, 반쯤은 진짜 궁금하기도 하시겠죠. 근데 사실 저희 친구들끼리는 오랜만에 만났다고 해서 성적이나 등수를 대놓고 물어보진 않거든요. 예의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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