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역사교육 연구자들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흥사단 강당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이 선언에는 역사 원로교수·교수·강사·대학원생 1167명이 이름을 올렸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교사, 숭실대 철학과 겸임교수)
[한겨레 사설] 서울대 역사교수들도 나선 ‘국사 국정화’ 반대
서울대 역사 전공 교수 34명이 2일 한국사 국정 교과서를 재도입하려는 정부·여당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황우여 교육부 장관에게 전달했다. 국사·동양사·서양사·고고미술사·역사교육과 교수의 77%가 의견을 한데 모았다. 이들은 “주변 역사학자 중에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초·중·고교 역사 교사 2255명도 이날 반대 선언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1차 선언보다 갑절이나 많은 교사들이 실명으로 참여했다. 학계와 교육현장의 우려가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하는 행동들이다.
이들의 논리는 명쾌하다. “정부가 공인한 하나의 역사해석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결과를 가져올 국정 교과서는 역사교육의 본질에 정면으로 위배”되며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규정한 헌법 정신과 합치하지 않는다.” 실제 그렇게 하는 나라는 북한을 비롯한 일부 억압적 체제뿐이다. 5년 주기로 교체되는 정권의 역사관에 따라 교과서가 흔들리게 된다면 세계적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런 우려가 기우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국회 연설에서도 확인됐다. 김 대표는 “우리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굴욕의 역사’라고 억지를 부리는 주장은 이 땅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표명한 역사관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말을 통해 김 대표는 ‘집권세력이 선호하는 특정 역사관만을 가르치고 싶다’는 의도를 노골화한 셈이다.
“부정의 역사관은 절대 피해야 한다”는 김 대표의 시각 자체도 잘못됐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것 못지않게 그 실패와 폐단을 성찰하는 데 있다. 똑같이 침략전쟁을 일으켰지만 독일은 철저히 반성하는 역사관을 가진 데 반해 일본은 틈만 나면 과오를 숨기고 영광만 포장하려 한다. 어느 게 옳은 태도인지는 자명하다. 김 대표가 말하는 ‘긍정의 역사관’이란 게 현 정부 들어 검정에 합격했던 교학사 교과서처럼 친일과 독재 같은 오욕의 역사를 왜곡·미화해야 한다는 의미인지 묻고 싶다.
거듭 강조하지만 집권세력이 강요하는 ‘관제 역사’는 이제 인류 문명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폐품이다. 서울대 교수들의 지적처럼 역사 교과서 서술을 정부가 독점하게 되면 “역사적 상상력과 문화 창조 역량을 크게 위축시키고, 민주주의는 물론 경제 발전에도 장애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국가적 수치이자 숱한 폐단만 낳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당장 중단돼야 한다.
[중앙일보 사설] 역사 교과서, 국정 발행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역사 교과서 발행 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2018년부터 고교생이 배우는 교과서를 국가가 발행하는 국정(國定)으로 할지, 현행처럼 민간이 다양하게 만들면 국가가 심의·승인해주는 검정(檢定)을 유지할지가 핵심이다. 학계에 맡겨둬야 할 일에 정치권이 끼어들어 일이 커졌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엊그제 국회 연설에서 “편향된 교육을 막기 위해 국정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자 새정치민주연합이 “민주화와 함께 폐기된 군사정부로의 회귀”라며 극력 저지를 예고했다. 이번 국정감사가 ‘역사 전투장’이 될 우려도 있다.
국·검정 여부는 이달 말 교육부가 고시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포함된다. 최종 결정권자인 황우여 부총리가 국정화 뜻을 비춰 국정이 기정사실화하는 양상이다. 역사학계와 교사들은 황당해한다. 서울대 역사 전공 교수 34명은 엊그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자주성을 보장한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며 반대 성명을 냈다. 역사 교사 2255명도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이 우려된다”며 불복종 운동을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정이 국정화를 밀어붙이면 교육 현장에 큰 혼란이 벌어질 게 자명하다.
세계적으로도 역사 교과서는 검정화가 대세다. 미국·유럽 등은 자유발행체제로 다양하고 질 좋은 교과서를 제공한다. 국정은 관제사관(官制史觀)을 주입하는 북한·베트남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헌법재판소도 1992년 국정교과서가 “위헌은 아니나 바람직한 제도는 아니다”고 판결한 바 있다.
따라서 국정은 올바른 대안이 될 수 없다. 과거 군사정부 때처럼 입맛에 맞게 교과서를 주무르는 시대는 지났다. 대안은 올바른 정사(正史)가 담긴 질 좋고 내용 풍부한 교과서다. 현행 검정제를 강화해 집필 기준에 국가 정체성 내용을 명시하고 편향성을 엄격히 심사해야 한다. 현재 대여섯 명에 불과한 집필자도 대폭 늘려야 한다.
역사학계의 치열한 노력도 필요하다. 보수·진보 각자 주장만 하지 말고 중립적이고 균형 잡인 교과서 개발에 힘을 결집해야 한다. 당장 공동 토론회부터 열 필요가 있다. 당정의 역할은 바로 이런 일을 돕는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교과서를 바꿀 셈인가.
[추천 도서]
[키워드로 보는 사설] 긍정의 역사관 vs 다원적 관점의 역사관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 진영의 사회적 갈등은 2004년부터 첨예하게 드러났다. 당시 금성출판사 교과서(근현대사)를 두고 보수 쪽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2008년에도 재발했다. 2013년에는 교학사 교과서(한국사)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사건은 달랐지만 서로의 역사관에 대하여 ‘좌편향, 친북’ 또는 ‘친일, 독재 미화’라고 비난한 점이 모두 같았다. 이번 국정 교과서 갈등과도 논점이 유사하다. ‘2011 교육과정 개정’ 당시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집필기준과 관련한 대립에서는 논점이 조금 달랐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민주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한 것에 대한 학계의 개념 논쟁이었다. 찬성 쪽의 입장은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가능했다는 주장이고, 비판하는 학자들은 민주주의에 담긴 여러 가치 중 ‘자유’만 강조하는 것은 보수적인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편향적 시각이라는 주장이었다. 대립하는 입장 중 한쪽은 스스로를 ‘긍정 사관’이라 부르며 우리 역사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문화에 맞추어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국가정체성을 갖출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에 입각하여 건전한 안보 및 역사의식을 제고하는 역사교육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일제하 민족 개량주의자들을 계승하거나 극우반공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라 경계하면서, 다양한 의견 제시를 멈추고 정부 정책에 따르기를 강요하는 국가주의 역사관이라 비판하고 있다. 다른 한쪽은 역사 교육은 ‘다양성의 원칙’ 아래 학생들이 창의적 사고를 가진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려면 여러 주체들의 다양한 가치를 접하고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자세를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은 과거에 대한 현재적 해석일 수밖에 없으므로 하나의 역사 해석만을 강조하는 획일적 역사의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특정 이념에 치우친 교육이 확산되면 균형 있는 역사인식과 국민통합을 저해하므로 보편적 가치교육을 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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