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중턱의 학교에서 시내로 차를 타고 나가다 보면 마을 가정집 벽에 학생들이 그린 벽화를 볼 수 있다.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이 마을에 있는 고대산 입구의 이정표부터 시작해 마을 건물 곳곳의 벽화에는 레이저로 목재를 가공해 만든 꽃·곤충 등 다양한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다. 폐드럼통 바깥면에 그림을 그려 재활용한 화분에는 큰 나무를 심었다. 백학면 백학초등학교의 시멘트 구조물에는 나무·천사·자전거를 타는 아이 등 예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연천군 곳곳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인근 화요일아침예술학교(이하 ‘학교’)의 교사·학생들이다. 이들은 연천군 신서면 마을 가꾸기 사업을 도맡는가 하면, 전곡읍 양원리에 있는 학교 주변 주민 가정집 벽에도 벽화를 그린다. 산 중턱에 있는 학교로 올라가는 길목은 학생들의 야외갤러리나 다름없다.
2011년 개교한 학교는 미술을 공부하고자 하는 여학생들을 위한 학력인정 무료 대안고등학교다. 학교를 설립한 교장 홍문택 신부는 사제가 된 지 25주년이던 지난 2007년 어려운 형편 탓에 예술 공부를 못한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먹고 개인 재산을 내놓았다. 학교 이름은 ‘꽃(花)처럼 예쁘게 아침을 열며 살자’는 뜻을 담아 홍 신부가 직접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미술공부를 할 수가 없었거든요. 입시미술은 너무 비싸죠. 물감이나 기타 미술공부에 드는 비용도 만만찮고요. 재능은 있지만 돈이 없어서 미술을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꿈을 키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었어요.”
형편 어려워 미술공부 못한 신부
사재 털어 미술대안학교 설립
전교생 28명 공짜로 숙식도 해
사회서 받은 도움 환원한다 뜻으로
학생들 동네 벽화그리기 활동 등 해
기초수급자 등 사회적 약자 대상으로
매년 10월에 원서접수해
학교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조형물. 다양한 모양의 프라이팬에 그려진 그림도 학생들의 솜씨다.
학생휴게실에 걸려 있는 3학년 이서이양의 작품.
전교생 28명.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공부한다. 수업료뿐 아니라 숙식비용도 모두 무료다. 매 학기에 한 번 가는 수학여행도 학교에서 경비의 대부분을 부담한다. 학교를 설립할 때는 홍 신부의 개인 재산과 몇몇 기부자들의 도움을 받았고, 현재 학교를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은 대부분 학교의 취지에 공감해 매달 일정금액을 내는 후원회원 약 1만6400명의 후원금에서 나온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운영하는 만큼, 학생들의 벽화봉사는 받은 것을 환원하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수학여행에도 한센인 공소(천주교에서 본당보다 작은 단위를 말함) 등 소외된 곳을 새롭게 바꾸는 예술봉사활동을 꼭 포함한다. 백학초나 적암초, 대원초 등 인근 지역의 초등학교에는 학생들이 직접 미술교육봉사를 하러 나가기도 한다. 덕분에 연천 지역에서는 학교가 많이 알려졌다. 미술에 관심 있는 지역 학생들 사이에서도 ‘가고 싶은 학교’로 통한다.
파주 헤이리의 논밭예술학교 1층에는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상설갤러리도 있다. 갤러리에 진열된 학생 우수작품이 팔리는 경우, 학교는 학생이 졸업할 때 개인 계좌에 작품 수입 명목으로 장학금을 지급한다.
홍 신부는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디렉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소득층 아이들은 고교를 졸업해 대학에 간다고 해도 등록금을 비롯해 재료비 등에 많은 부담을 느끼죠. 학생들에게는 예술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돕는 ‘다리’가 필요합니다. 열린 공간에서 미술작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인근 지방대학의 미대생이나, 학교 졸업생에게 미술활동으로 하는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주기도 해요. 미술을 하는 학생들이 편의점이나 카페에서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안타깝고 아까운 일이거든요.”
지난 7일 경기도 연천의 화요일아침예술학교에서 포즈를 취한 학생들. 뒷줄 가운데 선 이가 학교를 세운 홍문택 신부다.
이 학교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대부분 시간제로 근무한다. 서울시의 여러 고등학교에서 역사과목을 가르치다 퇴임한 뒤 이곳에 부임했다는 이주명 교감은 “퇴임한 교사들이 재능기부를 하거나, 소정의 강사료만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러 오는 선생님도 계셔요. 학교가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선생님들을 초빙하는 일이 가장 어렵죠”라고 말했다.
2학년 임성숙양은 “일러스트레이션 공부를 하고 싶어서 애니메이션고등학교 등 다양한 미술 전문 고등학교를 알아봤었어요. 그런데 학비가 너무 비싸더라고요. 진로상담을 해주시던 중학교 때 상담선생님께서 추천을 해주셔서 들어오게 됐어요. 미술을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요”라며 웃었다.
1학년 대표 이하연양은 2013년 말 이 학교에 원서를 넣었으나 불합격했다. 다른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곧 자퇴하고 지난해 재도전 끝에 합격한 ‘재수생’이다.
“제주도에서 자라다 보니 다양한 정보를 접하기도 상대적으로 어렵고, 특히 미술공부를 어떻게 할지 막막했는데, 엄마 친구분이 어떻게 아셨는지 이런 학교가 있다고 소개를 해주셨어요. 첫해에 떨어지고 다른 학교에 진학했지만 결국 발길이 이곳으로 오더라고요.”
학교에 입학하려면 기초생활수급자·한부모가정 등 사회적 약자의 자녀여야 한다. 학년별로 최대 13명, 최대 39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학교 주변에 사는 연천지역 학생들 가운데 미술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을 위한 특별전형도 운영한다. 매년 10월 중 원서접수가 시작되며, 누리집(www.flowerdaymorning.com)에 자세한 내용이 안내되어 있다.
글·사진 정유미 기자
ymi.j@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