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충북 보은에 위치한 속리산중에서 열린 ‘다섯손가락 리더십 캠프’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꼬리잡기’ 게임을 하고 있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아싸~~ 이겼다!”
체육관이 떠나갈 듯 큰 함성이 쏟아졌다. 교사와 학생으로 꾸려진 모둠원들이 앞사람의 어깨나 허리에 손을 올려 기차를 만들었다. 각각의 모둠은 체육관 안을 돌다 마주친 다른 모둠과 가위바위보를 했다. 진 모둠은 이긴 모둠의 맨 뒤에 가서 붙었다. 지난 24일 충북 보은에 위치한 속리산중학교. ‘꼬리잡기’ 게임이 한창이었다. 교사와 학생들은 서로 어울려 얼싸안거나 하이파이브를 하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 ‘형제가 둘 이상인 사람’ ‘이름에 ‘영’자가 들어간 사람’ 등 공통점이 있는 사람을 찾아 사인을 받아 오는 게임 뒤에는 모둠별로 학생끼리 혹은 교사와 학생 간 서로 고맙고 미안했던 일을 털어놓는 시간도 있었다. 독특한 점은 학년이나 반별로 모둠을 구성한 게 아니라 기숙사 한방을 쓰는 학생끼리 모둠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기숙사 생활 처음 해보는 중학생들
학년별로 ‘엄지’ ‘중지’ ‘소지’ 이름 주고
방 관리, 후배 돌보기, 규칙 잘 지키기 등
각자 책임감 느끼게 할 구실 만들어줘
배려심·나눔 등 인성교육 저절로 돼
‘대안가족’ 분위기로 학교 전체 화기애애
속리산중은 기숙학교라 전교생 160여명이 주중 내내 숙소에서 함께 지낸다. 그만큼 선후배나 동기들 사이에 대인관계를 맺고 사회성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 이날 연 ‘다섯손가락 리더십 캠프’는 매년 3월 신학기에 신입생들의 학교생활 적응을 돕기 위해 만들었다. 전교생과 전 교사가 몸을 부대끼며 마음을 열고 친밀감을 쌓는 시간이다.
이 리더십 캠프는 학교에서 마련한 ‘다섯손가락 프로그램’(이하 다섯손가락)의 일환으로 실시한 것이다. ‘다섯손가락’은 학교 구성원끼리 돈독한 정을 쌓으며 학교문화를 만들어가는 ‘학생 자율 인성 생활지도’ 프로그램으로 각각 남녀 기숙사 한방을 쓰는 1~3학년 5명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3학년을 ‘엄지’, 2학년을 ‘중지’, 1학년을 ‘소지’라고 부른다. 각각의 구실도 분명하다. 3학년은 방을 총괄 관리하고, 2학년은 1학년을 돌보며, 1학년은 선배들에게 기숙사 생활 규칙과 태도 등을 배워서 학교생활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다.
이옥영 수석교사가 다섯손가락을 처음 시작한 건 7년 전. 학교폭력과 왕따를 줄이기 위한 취지였다. 교실 안 문제는 대부분 곪을 대로 곪다가 터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학교폭력이나 왕따를 당해도 담임교사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잘 안 한다”며 “밀고자, 배신자로 찍혀 또 다른 왕따를 당할까봐 두려워서”라고 말했다. “괴롭히는 학생은 장난이라며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생들은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즐기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학급 임원들에게 ‘우정지키미’ ‘(또래)돌보미’ 등의 이름을 붙여주고 반 아이들과 몇 명씩 짝지어 돌보게 했다. ‘고자질’이 아닌 정식 직함을 주고 ‘직무 수행’이라는 걸 강조한 것이다. 임원들은 왕따나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있으면 상담교사나 담임교사에게 적극 알리도록 했다. 이후 아이들 관계나 반 분위기가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 뒤 속리산중으로 학교를 옮겨서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보통 기숙사를 운영하는 학교의 경우 중간에 퇴사하는 학생들이 있다. 선후배간 규율이 엄격하거나 1학년의 경우 단체생활에 적응을 못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자기 위주로 자유롭게 생활하다 꽉 짜인 틀 속에서 타인과 한방에 섞여 지내는 것은 학생들은 물론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속리산중 학생들이 기숙사 한방을 쓰는 다른 구성원에 대한 ‘관찰 내용’과 ‘도움을 주고받은 일’을 기록한 관찰일지.
대부분 기숙학교는 사감 교사 한 명이 기숙사 전체를 관리하거나 학년별 지도교사를 두는 식으로 운영한다. 이에 반해 속리산중은 교사 한 명당 기숙사 2호실을 담당한다. 교사와 학생 간 긴밀한 유대관계를 쌓는 것이 평소 생활지도에도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문제가 생기면 바로 본인 기숙사 호실 담당 지도교사에게 알려야 한다. 학생이 이를 묵인할 경우 벌점을 받는다. 강제성을 띤 것은 아이들이 책임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교사는 “본인이 왜 엄지인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제대로 활동할 수 있다”며 “처음에는 각자 역할에 익숙해지도록 의무감을 부여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후배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서로 알아서 챙긴다”고 말했다.
교사와 학생이 기숙사에서 일어난 문제를 함께 해결한 적도 있다. 한 선배가 후배들을 툭툭 치고 다니거나 샤워장에서 후배들이 머리를 감고 있는데 불을 일부러 꺼버리는 일이 있었다. 당하는 아이들은 불편하고 싫었지만 선배라 말을 못하다가 자기 방 담당 지도교사한테 상담을 했다. 최현아 진로부장은 “교사가 해당 호실 학생들과 모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며 “그때 후배들이 선배가 한 행동이 무섭고 싫다고 했고 선배는 재미로 장난삼아 했는데 그렇게 받아들였는지 몰랐다, 미안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 일처럼 학생들 간 갈등이 생겼을 때 교사가 서로 대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심각한 경우 직접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엄지’ 박미진(3학년)양은 “방을 같이 쓰면서 처음에는 생활습관도 서로 다르고 말이 너무 없어서 친해질 수 있을까 걱정되는 아이도 있었다”며 “그래도 선배니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내가 배웠던 걸 다시 알려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제가 1학년이었을 때 3학년 선배가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방 청소나 기숙사 규칙을 다 알려줬어요. 언니들한테 세탁기 사용하는 법이랑 빨래 개는 법도 처음 배웠어요. 이제는 제가 그 노하우를 후배들한테 가르쳐주고 있어요.(웃음)”
다섯손가락은 외둥이가 많은 요즘 학생들에게 ‘대안 형제자매’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 학교는 전교생이 매일 관찰일지를 쓴다. 한방을 쓰는 구성원에게 관심을 갖자는 의미로 다른 구성원에 대한 ‘관찰 내용’과 ‘도움을 주고받은 일’을 기록한다. 학생들이 쓴 일지를 보면 ‘부모님이 그리울 때마다 (선배가) 내가 잠들 때까지 배와 머리를 쓰다듬어줌’ ‘내가 늦게 들어왔는데 (후배가) 내 옷을 대신 개주었음’ ‘영어 공부를 도와줬음’ ‘(언니가) 우리 반까지 찾아와서 시험 잘 보라고 응원해줌’ 등의 내용이 있다.
‘소지’ 한란경(1학년)양은 “외둥이라 언니들한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서 어렵고 엄마·아빠가 없으니까 생활이 불편했다”며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언니들이랑 친근해져서 앞으로 모르는 것도 물어볼 수 있을 거 같다”고 말했다.
3학년 손민권군도 “1학년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이 처음이라 점호나 빨래, 청소 등 정해진 규율을 익히는 요령이 필요하다”며 “집에서는 나 위주로 지내왔는데 이곳에서 후배들한테 조언해주고 먼저 나서서 청소도 하면서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집에 있는 가족이나 한 학교에 다니는 친형제자매보다 가까워졌다”고 입을 모았다. 마냥 챙김을 받는 ‘동생’에서 학년이 올라가며 ‘형, 누나’가 되자 책임감도 생겼다고 했다. 학생들이 서로 의지하고 생활하면서 인성교육은 물론 끈끈한 정이 넘치는 학교 문화가 ‘절로 만들어진 셈’이다.
글·사진 최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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