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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교과서 없이 보낸 한 달, 3년 공부할 힘 얻었죠

등록 2015-03-23 20:14수정 2015-03-24 13:25

부산기계공고 학생과 교사들이 안동의 도산서원을 방문해 선비문화 체험을 하는 모습. 부산기계공고 제공
부산기계공고 학생과 교사들이 안동의 도산서원을 방문해 선비문화 체험을 하는 모습. 부산기계공고 제공
부산기계공고 ‘학습 동기 유발 학기제’
3월 첫달, 교과서와 수업 없이
진로활동 통해 ‘배움 의미’ 찾게 해
공부의 목적 자연스레 알게 된 학생들
자기주도적으로 고교 계획 세우고
미래 진로도 구체화하기 시작해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1학년들은 입학 후 첫 한 달은 교과서 없이 학교에 간다. 학생들의 교과서는 도서관에 단단히 묶여 있다. 학생들이 교과서를 보고 싶다고 해도, 4월이 오기 전에는 꺼내 볼 수 없다. 3월 한 달 교과서를 대신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학습동기유발학기>라는 제목의 워크북을 한 권씩 나눠준다. 부산기계공고에서 2013년부터 3년째 시행하는 학습동기유발학기제(이하 유발학기)는 신입생들이 첫 고교생활을 시작하는 3월에 다양한 체험활동과 진로프로그램에 집중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제도다.

프로그램은 ‘변화와 적응’, ‘자아성찰’, ‘진로탐색’, ‘도전과 결실’ 등 4가지 주제로 이루어져, 학생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각자의 장단점을 살려 미래의 직업과 그 역할에 대한 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한다. 학생들은 4주 동안 학과별로 미래 직장을 방문하거나, 졸업한 동문 특강을 듣는 등 전형적인 진로체험 활동과 더불어 타인과의 소통과 협력을 위한 토론법이나 친구들과 함께 동작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스토리텔링 퍼포먼스’도 배운다.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을 달리거나, 안동 도산서원 탐방을 가는 등 현장 체험학습 활동도 있다.

400쪽에 가까운 워크북은 유발학기 프로그램 설명과 그때그때 활용할 수 있는 활동지로 차 있다. 활동지에는 ‘내가 받아 본 최고의 칭찬’,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자신의 신념’ 등을 주제로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적을 수도 있고, 학과별 직업체험 활동을 통해 느낀 소감이나 질문을 기록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기숙사 생활에서의 규칙 등 학교생활에 필요한 정보, 취업 정보도 담겼다.

신입생들은 지난 12~13일 3시간이 넘도록 자전거로 낙동강길을 달리며 친구들과 우애도 다지고, 호연지기도 길렀다. 부산기계공고 제공
신입생들은 지난 12~13일 3시간이 넘도록 자전거로 낙동강길을 달리며 친구들과 우애도 다지고, 호연지기도 길렀다. 부산기계공고 제공
학생들은 유발학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3년째 시행하는 프로그램이라 현재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3학년까지 모두 이 과정을 거쳤다.

“공부를 안 할 생각으로 기계공고에 진학했어요. 처음 학교에 와서 보는 배치고사도 반 이상은 그냥 찍었거든요. 한 학년 300명 가운데 230등 정도 했었어요. 근데 4주 동안 진행하는 유발학기를 통해서 ‘자격증 따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 취업도 잘 할 수 있겠구나’ 등 깨달음을 많이 얻었어요.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찾았던 덕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반에서 9등을 했어요. 나중엔 전교 1등도 했고요.”

2013년 처음 시행한 유발학기에 참가한 3학년 이영민군의 말이다. 3학년 박정수군은 “입학 전 중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저는 소극적으로 선생님이 지시한 대로만 움직였다”고 고백했다.

“4주간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이를 실천하는 법을 배우고 나서는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고민하게 됐어요.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학생들의 진로탐색 활동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한달 동안 수업 없이 체험학습이나 진로활동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과목별로 채워야 하는 수업시수도 있고, 학사 운영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이런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중순 교장은 이 프로그램을 시행하기 위해 교장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3월 한달로 과감히 몰았다. 교장공모제로 학교에 부임한 이 교장은 이 학교 10회 졸업생으로 학생들에게는 선배이기도 하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40여년 전과 비교해 봤을 때, 사용하는 기계들이 기술적으로 나아졌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내가 처음 받은 과제는 얇은 톱을 이용해 쇠파이프를 일정한 간격으로 자르는 것이었어요.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시작한 고교생활은 지치고 힘들었죠. 후배이자, 제자인 학생들이 학교에서 즐겁게 공부하고, 성장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건 학생들이 왜 배우는지, 이런 것들이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알고 학교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2학년 김정현군은 “4주의 프로그램이 끝나면 밥을 먹듯 일상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져요. 그 한달 동안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계속 배우다 보면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교과서가 없거든요. 공부에 안달이 나기 시작해요”라며 웃었다.

토론교육전문가인 서울 영동일고 유동걸 교사에게서 토론의 의미와 방법을 배운 학생들은 직접 ‘대학은 반드시 가야 하는가’ 등의 주제로 함께 토론을 통한 의견 나누기 활동을 하기도 했다.
  부산기계공고 제공
토론교육전문가인 서울 영동일고 유동걸 교사에게서 토론의 의미와 방법을 배운 학생들은 직접 ‘대학은 반드시 가야 하는가’ 등의 주제로 함께 토론을 통한 의견 나누기 활동을 하기도 했다. 부산기계공고 제공
4주의 프로그램이 끝난다고 해서 학생들의 유발학기 활동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매주 금요일 4교시에는 부산기계공고 전 학년 모두가 참가하는 명사특강 시간이 열린다. 동문 선배들을 비롯해 토론전문가, 번역가 등 다양한 사회인들이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기도 하고, 각자가 생각하는 삶의 가치를 학생들과 나누기도 한다.

3학년 제동균군은 “처음 들어올 때는 기계공고니까 그냥 막연히 기술 관련 분야에 진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배들 특강이나 학과 체험을 계속 하다 보면 기술직 가운데서도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생긴다”며 “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가다 보면, 정말 ‘내 일이다’ 싶어서 잘하고 싶은 욕심도 커질 거라 본다”고 말했다.

부산기계공고는 부산대 교육학과 연구팀과 함께 유발학기의 효과를 연구하고 있다. 입학 시점부터 1년 단위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60문항의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유발학기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필 계획이다.

정유미 기자 ymi.j@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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