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와 <중앙일보>가 함께 구성한 지면으로 두 언론사의 사설을 통해 중3~고2 학생 독자들의 사고력 확장에 도움이 되도록 비교분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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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설] 세계를 경악시킨 최악의 대언론 테러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서 7일(현지시각) 시사 주간지 회사 직원 10명과 경찰 2명이 한꺼번에 총기에 맞아 숨지는 최악의 대언론 테러가 발생했다.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한다. 하지만 범인 검거 등 후속 조처만큼이나 사태 악화를 막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할 상황이다.
언론을 상대로 한 테러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될 수 없다. 이슬람 급진파로 추정되는 범인들은 주간지 내용을 빌미 삼아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언론의 반이슬람 논조에 대해 경고하고 이슬람 근본주의 이념의 확산을 노린 것 같다.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이는 민주사회의 대들보인 언론과 시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잔인한 범죄일 뿐이다. 이들이 이슬람 테러집단과 연계돼 있다면 더 그렇다. 언론 보도 내용을 무력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
이번 테러는 최근 유럽 전역에서 외국 태생의 주민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커지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어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프랑스는 식민주의 역사 등과 맞물려 이슬람권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이슬람계 인구 비율이 전체의 10%에 가깝다. 유럽 나라 가운데 반이민 정책을 내세운 극우정당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이 이슬람포비아(이슬람 혐오증)와 결합할 경우 프랑스 사회가 심한 갈등과 분열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다른 나라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프랑스는 관용을 중시해온 나라답게 이번 사건에 슬기롭게 대처하기 바란다.
이번 사건은 과격세력이 커지지 않고 국민통합을 이루도록 꾸준히 정책을 펴나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프랑스 내 이슬람계 인구가 수백만명이라고 하더라도 급진파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슬람계 주민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과 이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은 급진파의 목소리가 커질 토양을 제공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계속되는 불황으로 백인 근로계층의 박탈감이 커진 것도 반이슬람 정서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공격받은 주간지가 심한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반이슬람 만화를 되풀이해서 실은 것도 문제가 있다. ‘표현의 자유’가 ‘갈등 유발의 자유’일 수는 없다.
우리 사회는 이번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미 170만명을 넘어선 국내 외국인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불안하게 살아간다. 유럽 나라들이 이슬람 과격파의 테러 및 이슬람포비아와 씨름하는 것을 남의 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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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사설] 언론에 대한 반문명적 테러를 규탄한다
백주에 언론사 편집국이 총기난사를 당해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그제 파리에서 일어났다. 테러의 표적이 된 프랑스의 풍자 전문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 담당기자 4명 등 12명이 학살극으로 목숨을 잃었다. 언론을 정조준한 반(反)문명적이고 야만적인 테러에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언론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다. 언론에 대한 테러는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공격은 세계 언론 모두에 대한 공격이다.
샤를리 에브도는 종교적 극단주의와 극우주의를 배격하며 주로 만평을 통해 정치·사회·종교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해온 신문이다. 풍자의 대상에서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무슬림들의 협박과 테러 위협이 그치지 않았고, 실제로 화염병 공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이번 사건도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 방향에 대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불만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충격적인 테러를 통해 언론의 자기검열을 유도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테러로 언론에 재갈을 물릴 수 있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성역과 금기를 의식하는 순간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 종교라고 해서 비판과 풍자에서 예외일 순 없다. 비판에서 벗어난 종교는 도그마일 뿐이다. 그런 도그마의 산물 중 하나가 이슬람 극단주의다. 테러리스트는 진짜 무슬림이 아니다.
유럽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민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민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랍과 아프리카계 무슬림의 인구비중이 커지면서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공포증)’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유럽에서 무슬림 인구 비중이 가장 높은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이민자 배척을 주장하는 프랑스의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FN)이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란 말이 벌써 나오고 있다. 이번 참사가 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보복 심리를 자극해 인종과 종교 갈등을 부추기고, 유럽의 극우화를 가속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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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대 논리]
한겨레 “국민통합 이루게 정책 펴야”…중앙 “유럽 극우화 가속 경계해야”
지난 7일 저녁 프랑스 중남부 클레르몽페랑시에서 열린 추모집회에서 한 여성이 “나는 샤를리다”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날 테러리스트의 총기 난사로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직원 10명과 경찰 2명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이들에 대한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AFP 연합뉴스
단계 1 공통 주제의 의미
지난 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시사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테러가 있었다. 무려 10명의 직원과 2명의 경찰관이 총에 맞아 숨졌으며 부상자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겨레와 중앙은 한목소리로 비판을 한다.
한겨레는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이는 민주사회의 대들보인 언론과 시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잔인한 테러일 뿐”이며, “언론 보도 내용을 무력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중앙 또한 “언론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이며, “언론에 대한 테러는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사람마다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만큼은 인정하겠다”는 자세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다른 목소리를 낼 여지가 없을 때, 사회는 전체주의에 빠져버린다. 언론의 자유를 ‘민주사회의 대들보’이자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라 보는 데 있어 두 사설의 입장은 전적으로 같다.
단계 2 문제 접근의 시각차
하지만 이번 테러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사설의 입장이 미묘하게 갈린다. 먼저 중앙부터 살펴보자. 중앙은 “테러리스트는 진짜 무슬림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유럽에 널리 퍼지는 반(反)이슬람 정서가 옳지 않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셈이다. 나아가 중앙은 “이번 참사가 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보복 심리를 자극해 인종과 종교 갈등을 부추기고, 유럽의 극우화를 가속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정치학자 찰스 타운센드에 따르면, 테러리스트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목적은 상대가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지 않다. 테러리스트들의 진짜 목표는 ‘테러에 대한 국가의 보복’을 이끌어 내는 데 있다. 정부가 테러를 막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선량한 피해자’들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여기서 또 다시 공격의 빌미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정부의 정당성은 서서히 무너진다.
인종과 종교 갈등이 커지고 유럽의 극우화가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중앙의 진단은 타운센드의 분석과 맥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을 좌절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해 한겨레는 “과격세력이 커지지 않고 국민통합을 이루도록 꾸준히 정책을 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겨레는 “이슬람계 주민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과 이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은 급진파의 목소리가 커질 토양을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단계 3 시각차가 나온 배경
2005년 영국 런던 7·7테러, 2013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 테러, 지난해 캐나다 오타와 국회의사당 총격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테러에는 일종의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이슬람에 대한 차별이 심해진다. 분노한 무슬림들이 폭력 사건을 일으키고 여기에 대한 극우파의 자극이 이어진다. 이는 다시 보복테러를 불러와 ‘테러와의 전쟁’으로 확대된다.
“프랑스는 관용을 중시해온 나라답게 이번 사건에 슬기롭게 대처하기 바란다”는 한겨레의 충고에는 이런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바람이 담겨 있다. 중앙 또한 “유럽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민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나아가 유럽에서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공포증)’가 커지고 있는 현상”도 짚어낸다.
눈앞의 테러를 막는 일은 중요하고 시급하다. 하지만 테러에 대한 ‘근본처방’은 폭력을 부르는 사회 갈등을 없애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표현의 자유’가 ‘갈등 유발의 자유’일 수는 없다”는 한겨레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목소리가 나올 리 없다. 하지만 가뜩이나 박탈감이 큰 무슬림들에게 그들이 신성시하는 무함마드(마호메트)를 희화화한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이 과연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언론에 대한 테러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테러에 대한 대처와 처방은 깊은 원인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유럽의 극우화를 걱정하는 중앙의 생각과 국민통합을 위한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겨레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키워드로 보는 사설]
테러를 당한 ‘샤를리 에브도’
‘샤를리 에브도’는 1970년에 문을 닫은 ‘하라 키리’의 정신을 이어 받아 창간한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이다. ‘바보 같고 심술궂은 잡지’를 표방한 ‘하라 키리’는 종교, 정치, 문화, 경제를 넘나들며 성역 없는 풍자를 이어갔다.
‘샤를리 에브도’ 또한 거침없는 풍자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뿐 아니라, 다른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도 거침없이 희화화시키곤 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 아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모습을 담아 가톨릭 신자들의 거센 반발을 부르기도 했고, 가수 마이클 잭슨이 죽었을 때는 “마침내 백골(白骨)로 하얗게 되었다”라는 말풍선을 달아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2006년, 샤를리 에브도는 잡지 안에 무함마드(마호메트) 캐리커처를 담았다. 이는 당연히 예언자 무함마드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슬람권의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샤를리 에브도’는 2006년, ‘두즈 선언문’ 발표를 주도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이슬람주의는 종교적 전체주의로서 나치즘이나 파시즘처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 뒤로도 샤를리 애브도는 무함마드에 대한 풍자를 이어갔고, 이에 대한 공격도 계속되었다. 지난 7일, 편집인 10명이 죽는 끔찍한 테러를 당했음에도 샤를리 에브도는 굽히지 않고 ‘신성모독적 풍자를 할 권리가 있다’며 맞서고 있다. 하지만 과연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 만평이 정당하고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추천 도서]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투쟁찰스 타운센드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010년
미디어의 힘 견제해야 할까데이비드 애보트 지음
내인생의책 펴냄, 2012년
“테러리스트는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 단순히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을 저울질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또는 그녀가 싸우고 있는 대의와 자신들을 동일시한다.”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투쟁>의 지은이 타운센드의 말이다. 테러는 폭력을 ‘수단’으로 삼아 ‘합리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행위가 아니다. 테러리스트들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폭력으로 자신의 신념을 널리 알리려 한다. 언론이 테러가 불러온 피해와 공포를 많이 알릴수록 테러리스트들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저널리스트들은 무엇이 보도될 가치가 있고 없는지, 어떤 사실을 어떤 목적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표현하여 알려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미디어의 힘 견제해야 할까>는 언론인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언인지를 조목조목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