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디지털] ‘디폴트 세팅’의 함정
페이스북은 최근 세계 12억8000만 사용자의 사생활 보호와 관련된 새로운 정책 도입을 발표했다. 페이스북이 지난달 22일 밝힌 내용은 신규 가입자들이 올리는 콘텐츠 공개 범위의 기본 설정을 기존의 ‘전체 공개’에서 앞으로 ‘친구’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예컨대 예전에는 어떤 대학 신입생이 페이스북에 새로 가입해 “어제 진탕 술 마셨다”고 글을 올리면 누구나 볼 수 있었다. 특별히 공개 범위를 ‘친구’로 바꿔주기 전에는 말이다. 앞으로는 이게 달라진다는 게 이번 변화다.
이는 주로 프라이버시권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지만, 사용자의 ‘기본 설정’(디폴트 세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기본 설정은 복잡한 디지털 기기나 컴퓨터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주로 쓰이는 말이지만, 사실 우리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개념이다. ‘초기 설정 값’이 중장기적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힘’이라 할 수 있다.
개인사업자 송준한(34)씨는 커피 마니아지만 최근 위장 질환으로 커피 소비를 줄이게 되었다. 예전에는 하루 3~4잔이 기본이었지만 요즘은 한잔도 채 못 마신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때렸다. “요새는 커피전문점을 가서 가장 작은 크기를 시켜도 다 못 먹고 남겨요. 그런데 왜 꼭 그만큼 시켜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돈과 커피를 함께 낭비하는 셈인데.”
기본 설정의 문제다. 여기서는 커피전문점이 정해 놓은 컵들의 용량을 기본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소비자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비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미국 코넬대학 브라이언 원싱크 교수는 음식 용기의 크기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재미있는 실험을 한 바 있다. 그의 연구진은 2005년 영화 관객들을 대상으로 오래된 팝콘을 무료로 나눠주는 실험을 했는데, 절반은 큰 통에, 다른 절반은 작은 통에 담아서 주었다. 연구진이 영화가 끝난 뒤 사람들이 “맛없다”고 불평하며 먹은 팝콘의 양을 측정한 결과, 큰 통을 받은 이들은 작은 통에 받은 사람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53%나 더 많이 먹은 것으로 드러났다.
페이스북 게시물 기본 공개범위
사용자 사생활 침해 논란 일자
‘전체’서 ‘친구’로 설정 변경 한번 설정한 디지털 사용환경
알게 모르게 생활에 큰 영향
기본 설정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내가 원치 않는 결과 올 수 있어
내게 맞는 건지 살펴보고 고쳐야 이런 식의 기본 설정과 관련된 삶의 요소들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종종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주요 사례로는 각종 보험, 통신요금, 연금, 대형 판매점의 진열 규칙이나 회사들의 각종 마케팅 기법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설정은 사람 심리에 대한 조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 설정 자체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통계청의 발표를 보면, 2012년 서울시의 자살률은 6년 사이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10만명당 23.8명으로 전년에 비해 11.5%나 감소한 수치다. 영향을 끼친 요인은 다양하지만 지하철 안전문(스크린도어) 도입도 큰 기여를 한 것으로 꼽힌다.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의 지하철역에는 대부분 안전문이 도입되었다. 지하철역 플랫폼은 뚫려 있다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이제는 닫혀 있어야 한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기본 인식이 됐다. 기본 설정이 강력한 이유는 사람들의 타성 때문이다. 가까운 예가 텔레비전이다. 사람들은 보통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다음 프로그램을 그대로 두는 성향이 있다. 2012년 <이코노믹 저널>에 실린 이탈리아의 관련 연구를 보면, 어떤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10% 올라가면, 그 뒤에 나오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평균 2~4%포인트 따라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굳이 공을 들여 채널을 바꾸지 않는 게 보통사람들의 자연스런 성향이다. 문제는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 활용될 수 있고, 그로 인해 당사자가 원치 않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를 쓰다 보면 종종 인터넷 홈페이지(시작점)가 바뀌거나, 못 보던 툴바(여러 기능을 한곳에 모아둔 상단의 막대형 프로그램)가 깔린 경우를 한번쯤 경험하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 공짜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도중에 일어난 일들이다. 설치 과정에 ‘홈페이지를 ○○○로 바꾸는 데 동의하십니까’, ‘툴바를 함께 설치합니까’ 등의 질문이 나오는데, 사용자가 관성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느려지는 내 컴퓨터’다. 설치 과정을 다시 살펴보면, “설치 동의”가 기본 대답으로 되어 있는 문제의 질문을 눈에 띄지 않는 어디에선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업무 전반에서 디지털 영역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누군가의 설계에 따라 축조된 사이버세상은 설정으로 구성된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설정은 합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관심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대표적 사회관계망서비스인 페이스북의 기본 공개가 이제야 ‘친구만’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지금껏 10억명 넘는 사람들이 쓴 글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온라인 프라이버시와 디지털 서비스 설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공개 범위를 바꿔줄 수 있었지만, 기술 이해도가 낮거나 관성을 따르는 다수에게는 먼 이야기인 셈이다. 페이스북의 이번 정책 변화도 세계적으로 커져가는 개인정보 보호와 상업적 광고활용 우려 목소리가 계기가 된 것으로 꼽힌다. 선택 설계에 대한 저서 <넛지>로 알려진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후속작 <심플러>에서 “일을 자동화하는 뛰어난 방법은 설사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디폴트 규칙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사용자 사생활 침해 논란 일자
‘전체’서 ‘친구’로 설정 변경 한번 설정한 디지털 사용환경
알게 모르게 생활에 큰 영향
기본 설정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내가 원치 않는 결과 올 수 있어
내게 맞는 건지 살펴보고 고쳐야 이런 식의 기본 설정과 관련된 삶의 요소들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종종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주요 사례로는 각종 보험, 통신요금, 연금, 대형 판매점의 진열 규칙이나 회사들의 각종 마케팅 기법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설정은 사람 심리에 대한 조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 설정 자체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통계청의 발표를 보면, 2012년 서울시의 자살률은 6년 사이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10만명당 23.8명으로 전년에 비해 11.5%나 감소한 수치다. 영향을 끼친 요인은 다양하지만 지하철 안전문(스크린도어) 도입도 큰 기여를 한 것으로 꼽힌다.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의 지하철역에는 대부분 안전문이 도입되었다. 지하철역 플랫폼은 뚫려 있다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이제는 닫혀 있어야 한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기본 인식이 됐다. 기본 설정이 강력한 이유는 사람들의 타성 때문이다. 가까운 예가 텔레비전이다. 사람들은 보통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다음 프로그램을 그대로 두는 성향이 있다. 2012년 <이코노믹 저널>에 실린 이탈리아의 관련 연구를 보면, 어떤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10% 올라가면, 그 뒤에 나오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평균 2~4%포인트 따라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굳이 공을 들여 채널을 바꾸지 않는 게 보통사람들의 자연스런 성향이다. 문제는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 활용될 수 있고, 그로 인해 당사자가 원치 않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를 쓰다 보면 종종 인터넷 홈페이지(시작점)가 바뀌거나, 못 보던 툴바(여러 기능을 한곳에 모아둔 상단의 막대형 프로그램)가 깔린 경우를 한번쯤 경험하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 공짜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도중에 일어난 일들이다. 설치 과정에 ‘홈페이지를 ○○○로 바꾸는 데 동의하십니까’, ‘툴바를 함께 설치합니까’ 등의 질문이 나오는데, 사용자가 관성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느려지는 내 컴퓨터’다. 설치 과정을 다시 살펴보면, “설치 동의”가 기본 대답으로 되어 있는 문제의 질문을 눈에 띄지 않는 어디에선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업무 전반에서 디지털 영역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누군가의 설계에 따라 축조된 사이버세상은 설정으로 구성된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설정은 합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관심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대표적 사회관계망서비스인 페이스북의 기본 공개가 이제야 ‘친구만’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지금껏 10억명 넘는 사람들이 쓴 글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온라인 프라이버시와 디지털 서비스 설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공개 범위를 바꿔줄 수 있었지만, 기술 이해도가 낮거나 관성을 따르는 다수에게는 먼 이야기인 셈이다. 페이스북의 이번 정책 변화도 세계적으로 커져가는 개인정보 보호와 상업적 광고활용 우려 목소리가 계기가 된 것으로 꼽힌다. 선택 설계에 대한 저서 <넛지>로 알려진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후속작 <심플러>에서 “일을 자동화하는 뛰어난 방법은 설사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디폴트 규칙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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