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홈스쿨] 일본 신도와 신사 참배
지난달 26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습니다. 일본 현직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한 것은 2006년 8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이후 7년4개월 만입니다. 이후 한국과 중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이들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두고 비판하는 이유는 뭘까요?
신사는 일본 황실의 조상이나, 국가에 공로가 큰 인물 또는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한 사당입니다. 이곳에는 이들을 위한 각각의 위패는 없고 이들을 상징하는 거울과 검 및 이름이 기재된 명부를 봉인해 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이런 사당이 일본 내에 약 8만1000개가 설치돼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그곳에 일본의 과거 침략행위 A급 범죄자들까지 ‘합사명부’에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A급 전범은 ‘국제조약을 위반해 침략전쟁을 기획·시작·수행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연합국의 국제군사재판에서는 독일과 일본의 전쟁범죄자를 A급·B급·C급으로 분류했습니다. A급 전범은 평화에 대한 죄로 모두 국제재판에서 처리됐습니다.
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A급 전범자 14명을 포함해 약 250만명의 합사명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8년 일본은 A급 범죄자들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했는데, 이 중에는 태평양 전쟁을 주도했던 도조 히데키 전 총리, 조선 총독을 지낸 고이소 구니아키, 만주사변 주모자 이타가키 세이시로, 난징 대학살의 주범 히로타 고키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특히 야스쿠니신사는 역사적으로 일본 근대천황제 국가신도체제 및 군국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6세기 백제를 통해 일본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일본에는 전통적인 신앙으로 신도가 있었습니다. 신도는 원래 조상·자연·농업 숭배 등과 관련되는 신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었습니다. 혈연에 따른 각 씨족 집단의 신앙이 집약되는 과정에서 고대 천왕가의 신앙으로 황실 신도가 형성됐습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천황제 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해 천황가의 신앙이며 일본의 전통 신앙인 신도를 국교화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종교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으로 서유럽 국가와의 교류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고, 일본 내 불교도들의 반발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실의 신도식 의식을 종교가 아닌 국가 의식으로 확립한 이른바 ‘국가 신도’를 확립했습니다. 이는 모든 종교 위에 군림하는 초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됐고, 천황은 국가 신도의 제주(祭主)로서 일본 국민을 정신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신사는 전통신앙 신도의 시설
죽은 이 신주 모시고 제사 지내
야스쿠니엔 2차대전 전범 포함
참배는 이들을 기리는 것이니
제국주의 침략전쟁 정당화하고
식민지 지배 반성 않는다는 뜻 국가 신도 체제하에서 일본의 개국신이자 천황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제신으로 모시는 이세 신궁을 정점으로 전국의 신사가 계열화됐습니다. 그중 야스쿠니신사는 원래 도쿄초혼사로 1869년 창건된 곳입니다. 여기서 ‘초혼’이란 죽은 자의 영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불러내 위로하는 것을 뜻합니다. 도쿄초혼사는 1879년에 야스쿠니신사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신사의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곳에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들어선 이후 수행했던 전쟁들, 즉 메이지유신부터 제2차 세계대전(대동아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국가 신도를 배경으로 사망자의 종교, 유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전사자를 야스쿠니신사에 신으로 모시고, 모든 제사의식을 신도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야스쿠니신사 당국은 전몰자의 이름, 사망 장소, 사망 날짜 등을 기록한 명부를 작성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했습니다. 이후에도 야스쿠니신사는 침략 전쟁 수행 및 전쟁 승리 결의대회 장소로, 또는 침략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 형성의 장소로 활용됐습니다. 한마디로 야스쿠니는 국가신도 체제의 중심적 신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점령 통치하에 놓였습니다. 지에이치큐는 천황제 및 군국주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했던 국가 신도를 해체하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을 시행했습니다. 이에 따라 전국의 신사들은 정부 기관의 관할에서 벗어나 종교 법인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야스쿠니신사도 1946년 9월 종교 법인으로 등기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야스쿠니신사를 반대하는 이유는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곳에 일본의 총리가 참배하는 것이 침략전쟁을 미화할 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군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조선인들은 일본이 일으킨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반강제로 동원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당시 우리 민족에게 일본은 ‘적국’이었습니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들과 피해자들을 한군데 묶어놓고 ‘일본의 수호신’으로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잠들어 있는 한 야스쿠니신사문제는 단순히 일본만의 문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문제도 될 수 없습니다. 교과서 펼쳐보기 | 제국주의는 왜 등장하였는가 제국주의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국내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유용하였다. 당시에 유럽 각국은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단합이 필요함을 역설하여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릴 수 있었다. (…) 제국주의는 국가의 정치적 위신을 높이는 데도 기여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국가의 영광과 번영의 상징으로서 식민지를 더 많이 거느리고자 하였고, 국민도 이를 환영하였다. 그런가 하면 자민족의 우월성을 배타적으로 내세워 다른 민족을 지배하려는 공격적인 민주주의 이념이 유행하여 제국주의를 촉진하였다.(고등학교 <세계사>, (주)금성출판사, 290쪽) 책으로 확장하기 | 신사의 본질은 ‘감정의 연금술’
일본의 대표적인 양심적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가 쓴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는 야스쿠니신사를 여러 각도로 접근한 책입니다. 2005년 발간된 이 책은 고이즈미 당시 총리의 발언과 관련 재판진술서, 언론기고 등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진실을 파헤칩니다. 특히 다카하시는 야스쿠니신사가 ‘감정의 연금술’에 의해 전사의 비애를 행복으로 탈바꿈시키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전사자를 단순히 추도하는 것이 아니라 현창하는, 즉 드높여 받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야만 천왕의 명예를 대가로 기꺼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질 병사들을 다시 전장으로 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논제로 정리하기 | 침략전쟁에 동조 순응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
2006년도 건국대 수시 논술 문제는 일본 침략세력과 독일 전체주의에 순응 또는 동조하게 되는 방식의 차이를 설명하고 각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제시문 (가)는 최인훈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회색인>의 일부로 일제 계몽적 지식인들이 실리를 추구한다는 명분하에서 친일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식층 및 지도층에 속하는 부류들이 일본을 이기기에는 너무나 강한 상대로 인식해 반항의 과정에서 생기는 부질없는 희생을 줄이고 그들에게 협력함으로써 실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유형이 등장합니다.
제시문 (나)는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두 가지 유형이 설명돼 있는데, 첫째는 독일 나치즘 시대의 노동자 계급들이 여러 번의 저항 시도가 실패함으로써 체념의 상황 속에서 나치즘 정권을 침묵 또는 방관하는 방식입니다. 나머지 방식은 대부분의 독일 국민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나치 정권이 힘을 얻게 됨에 따라 이 정권을 곧 “독일”과 동일시해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방식에 해당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치 정권을 지지하는 분위기 속에 고립되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경우입니다.
이런 방식들의 배경에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제 나름의 사정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나온 행동 방식을 제대로 설명하고 각 방식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수험생 본인의 입장과 평가를 제대로 논술해야 합니다.
최화진 기자 lotus57@hanedui.com
죽은 이 신주 모시고 제사 지내
야스쿠니엔 2차대전 전범 포함
참배는 이들을 기리는 것이니
제국주의 침략전쟁 정당화하고
식민지 지배 반성 않는다는 뜻 국가 신도 체제하에서 일본의 개국신이자 천황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제신으로 모시는 이세 신궁을 정점으로 전국의 신사가 계열화됐습니다. 그중 야스쿠니신사는 원래 도쿄초혼사로 1869년 창건된 곳입니다. 여기서 ‘초혼’이란 죽은 자의 영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불러내 위로하는 것을 뜻합니다. 도쿄초혼사는 1879년에 야스쿠니신사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신사의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곳에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들어선 이후 수행했던 전쟁들, 즉 메이지유신부터 제2차 세계대전(대동아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국가 신도를 배경으로 사망자의 종교, 유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전사자를 야스쿠니신사에 신으로 모시고, 모든 제사의식을 신도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야스쿠니신사 당국은 전몰자의 이름, 사망 장소, 사망 날짜 등을 기록한 명부를 작성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했습니다. 이후에도 야스쿠니신사는 침략 전쟁 수행 및 전쟁 승리 결의대회 장소로, 또는 침략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 형성의 장소로 활용됐습니다. 한마디로 야스쿠니는 국가신도 체제의 중심적 신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점령 통치하에 놓였습니다. 지에이치큐는 천황제 및 군국주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했던 국가 신도를 해체하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을 시행했습니다. 이에 따라 전국의 신사들은 정부 기관의 관할에서 벗어나 종교 법인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야스쿠니신사도 1946년 9월 종교 법인으로 등기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야스쿠니신사를 반대하는 이유는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곳에 일본의 총리가 참배하는 것이 침략전쟁을 미화할 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군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조선인들은 일본이 일으킨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반강제로 동원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당시 우리 민족에게 일본은 ‘적국’이었습니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들과 피해자들을 한군데 묶어놓고 ‘일본의 수호신’으로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잠들어 있는 한 야스쿠니신사문제는 단순히 일본만의 문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문제도 될 수 없습니다. 교과서 펼쳐보기 | 제국주의는 왜 등장하였는가 제국주의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국내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유용하였다. 당시에 유럽 각국은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단합이 필요함을 역설하여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릴 수 있었다. (…) 제국주의는 국가의 정치적 위신을 높이는 데도 기여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국가의 영광과 번영의 상징으로서 식민지를 더 많이 거느리고자 하였고, 국민도 이를 환영하였다. 그런가 하면 자민족의 우월성을 배타적으로 내세워 다른 민족을 지배하려는 공격적인 민주주의 이념이 유행하여 제국주의를 촉진하였다.(고등학교 <세계사>, (주)금성출판사, 290쪽) 책으로 확장하기 | 신사의 본질은 ‘감정의 연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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