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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역사적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등록 2013-06-24 20:08

일제강점하 유족회 등 일제 피해 관련 단체 회원들이 4월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침략역사 부정 망언을 규탄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일제강점하 유족회 등 일제 피해 관련 단체 회원들이 4월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침략역사 부정 망언을 규탄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함께하는 교육] NIE 홈스쿨|역사란 무엇인가
한국현대사학회의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심의를 통과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역사해석에 대한 논란은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E.H.카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살펴봅니다.

최근 한국현대사학회의 고교용 한국사 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심의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이 학회엔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으며, 일부는 2008년 전경련 후원으로 대안교과서를 발간한 바 있습니다. 이 교과서는 일제 병탄기를 근대화 역량 축적기로 설명하고 김구 선생의 행적을 설명하면서 ‘항일 테러 활동’이라고 기술해 논란을 빚었습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4월23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일본의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나 국제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국가 간에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합니다
역사가가 의미가 있다고
‘해석한’ 사건만
역사적 사실이 됩니다

이처럼 역사 해석을 두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끊임없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객관적 역사’란 존재하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꼭 읽어야 할 책이 있습니다.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입니다.

이 책은 1961년 출판되자마자 역사학도는 물론 현대 지식인의 필독서가 됐습니다. 특히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의 실증주의 사관을 비판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말로 유명합니다. 랑케는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게 역사가의 임무”라고 말했습니다. 역사가는 과거 사실에 개입하거나 해석하지 말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카는 과거의 사실이 무조건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역사가에 의해 의미가 있다고 ‘해석된’ 사건만 역사적 사실이 된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남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1월 1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 루비콘강을 건넜습니다. 카이사르 이전과 이후에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이 루비콘강을 통과했습니다. 아마 카이사르도 여러 번 건넜을 겁니다. 그러나 역사가는 ‘기원전 49년 1월의 그 사건’만 기억합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로마 공화정이 사실상 끝장나면서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역사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을 기록하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외무장관이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죽을 당시 300상자 분량의 문서를 남겼습니다. 그의 비서 베른하르트는 이를 요약해 600여쪽의 3권으로 구성된 <슈트레제만의 유산>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슈트레제만은 미국·영국·프랑스 등을 상대로 한 서방정책에선 큰 성공을 거뒀으나 소련을 상대로 한 동방정책에선 별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베른하르트가 낸 책에서 서방정책은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슈트레제만은 동방정책에 훨씬 더 비중을 두고 정성을 쏟았습니다. 또 그가 남긴 원본 문서에는 베를린에서 소련 대사와 벌인 수백 차례의 회담 기록, 소련 외교관 치체린과 20여 차례 회담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이 문서에서 슈트레제만의 주장은 항상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반면 상대의 주장은 빈약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만 남겨진 원본 기록 자체가 변질돼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가가 사용하는 말에는 그 시대의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고 현시대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경우 1960년대까지 동학난이라 불렸습니다. 이후 한때 동학혁명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역사책에 동학농민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4·19혁명도 원래 4·19의거, 4·19학생운동이라고 했다가 1991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4·19혁명이 공식 명칭이 됐습니다. 5·16은 군사정권 시절에는 5·16혁명이라고 했지만 김영삼 정부 이후 쿠데타라고 합니다.

카는 “역사가는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라고 했습니다. 둘 중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부분에 “역사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닌 기존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진보했다”고 썼습니다.

그는 역사가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그 과거에 대한 연구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전망을 올바르게 세워나가는 데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역사적 사실에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 교과서 펼쳐보기 | 역사란 무엇이며, 왜 배우나

“역사란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모든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사실을 아는 것을 불가능하다. 우리는 역사가가 수많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하여 이를 기록한 사실을 배운다. 그러므로 역사란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과 ‘과거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과거의 사실은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흔적을 찾아 과거의 사실을 밝혀내는 사람을 역사가라고 한다. 역사가는 역사 연구를 위해 유물이나 유적은 물론 과거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자료로 이용하는데, 이를 사료라고 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비롯해 비석이나 금속에 새겨진 글씨 등 문자 기록이다. 하지만 사료가 과거의 사실을 모두 정확히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기록을 찾아내고, 기록된 내용이 사실인지 여부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이것이 역사가가 할 일이다.”(중학교 <역사1>(천재교육) 역사의 의미와 역사 학습의 목적, 12쪽)

⊙ 논제로 정리하기 | 역사의 상흔을 대면하는 역사가의 자세

2011년도 한양대 논술 모의고사에서는 과거의 역사적 상흔을 대면하는 역사가의 자세에 대한 제시문 두 개를 소개했습니다. 두 제시문은 나치의 만행처럼 역사적 상흔을 남긴 고통스런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먼저 (가)는 역사적 과거를 과학적 인식과 객관적 이해의 대상으로 ‘역사화’ 해야 하는 불가피함을 주장하는 반면, (나)는 나치 시기처럼 민감한 역사적 과거를 ‘역사적 한계사건’으로 규정하고 역사적 중립성 대신 도덕적 판단과 책임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양대 논술은 각 견해를 비교하면서 그 장점과 한계를 논하라는 문제를 냈습니다. (가)의 주장이 역사적 인식의 객관성 확보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지만, 모든 역사적 사건을 상대화함으로써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위험성을 갖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장은 역사적 한계사건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피해자의 치유하기 힘든 역사적 기억과 상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반면 동시에 객관적 인식을 회의함으로써 오히려 비판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는 문제점을 제기해야 합니다.

최화진 기자 lotus57@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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