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9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 게일로드 내셔널 리조트 앤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3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 비’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리시(맨 오른쪽)가 예선 3라운드에서 ‘phenology’(계절학) 철자를 알아맞히는 순간이다. 윤선생 제공
영어 어휘력 경연대회 현장
한국 학생들은 철자를
눈으로 보기만 하면서 공부한다
그래선 단어를 들어도 모른다
소리와 철자의 관계를 알면
좀더 효율적이다 “Can I have the definition?”(정의를 알 수 있을까요?) 무대에 선 학생이 출제자에게 물었다. 2000여 객석이 3분의 2 이상 찼지만 대회장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A branch of science dealing with the relations between climate and periodic biological phenomena.”(생물학적 현상과 기후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과학의 한 분과) 자크 베일리 박사(미국 버몬트대 고전학 교수)가 긴 문장을 단숨에 읽자 한 학생이 침착하게 발음했다. “p(피), h(에이치), e(이), n(엔), o(오), l(엘), o(오), g(지), y(와이), 페널러지!” 지난 5월29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 게일로드 내셔널 리조트 앤 컨벤션센터. ‘2013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Scripps National Spelling Bee, 이하 SNSB) 예선 3라운드 현장에서 리시(13·부산국제외국인학교 중학 2학년)가 ‘phenology’(계절학)의 철자를 맞히는 순간이었다. 인도계 미국인 리시가 목에 건 이름표에는 ‘SEOUL. SOUTH KOREA’라고 적혀 있었다. 관중석에선 리시처럼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한국 학생 다섯이 환호했다. 아쉽게도 리시는 준결승까지 진출하지 못했지만 한국 대표인 자신을 응원하러 온 한국 친구들과 끝까지 대회를 즐겼다. 스펠링비는 단어 발음을 듣고, 철자를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맞히는 철자 맞히기 대회다. 올해 86회째 열린 SNSB에서는 미국 전역과 세계 10여 나라에서 진행한 대표 선발전을 통해 뽑힌 281명이 세계 우승 트로피를 놓고 경쟁했다. 대회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인종과 성별 등에 구애 안 받고, 언어로 친목을 다진다’는 점이다. 리시가 한국 대표로 나간 건 예선이 열리는 국가에 거주하면 국적과 관계없이 그 나라 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리시는 “미국에 살던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대표로 지역대회에 나갔었다. 2011년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따라 울산에 왔는데 한국에서도 대회를 나갈 수 있게 돼 감사하다”고 했다.
미국에선 학교마다 예선을 치러 SNSB에 나갈 지역 대표를 선발한다. 학생이 사는 지역의 언론사가 학생들의 교육문화 활동을 독려하는 뜻에서 후원사를 맡는 경우가 많다. 한국 대표 선발전은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가 주최하고 윤선생이 후원하고 있다.
웹스터 사전에 나오는 단어는 47만2000개. 지금껏 어떤 우승자도 이 사전을 모두 암기한 적이 없다. 학생들은 단어를 듣고, 접두사, 접미사 등 단어를 분해해 어원을 따져가며 철자를 맞혔다.
1981년 우승자로 이번 대회 총괄 책임자를 맡은 페이지 킴블은 “스펠링비 단어는 외워서 맞히는 게 아니라 단어의 어근과 어원을 따져가며 공부해야 맞힐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단어 형성 원리를 이해할 기회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올해 우승자인 인도계 미국인 아르빈드 마한칼리(13·미국 뉴욕주) 역시 “단어를 듣고, 각 나라의 어원에 맞는 패턴을 찾아 뜻을 추측했다”고 했다.
무대에 서면 출제자한테 단어의 정의·어원·예문과 또 다른 발음 등 네 가지만 질문할 수 있다. 이 질문을 바탕으로 단어를 유추한다. 올해는 ‘어휘지식평가’가 추가돼 예선 점수의 50%를 차지했다. 학생들이 사전 속 뜻만 보는 게 아니라 예문 속에서 단어의 쓰임을 알았으면 하는 뜻에서 추가한 항목이다.
이런 영어학습법이 한국에 던져주는 시사점도 크다. 리시의 어머니 비나 씨는 “한국 학생들은 철자를 눈으로 보기만 하면서 공부하는데 그래서 단어를 들어도 뭔지 모른다. 소리와 철자의 관계인 포닉스(phonics) 원리를 알고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닉스는 영어 철자와 소리의 관계를 이해해서 모르는 단어의 발음을 깨닫는 방법이다.
2009년 우승자이면서 자신의 동생 바니아 시바샹카르(11·미국 캔자스주 올레이시)를 응원하러 대회에 참석한 카비아(17)는 “학창 시절,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을 쌓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의학을 전공할 예정인데 스펠링비로 공부한 게 도움이 된다. 의학 분야 단어들은 그리스어 어원에서 나온 게 많다. 병에 관한 단어를 정확히 모르더라도 어근을 보면서 의미나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대회가 끝난 뒤 5월31일 금요일 밤 10시. 학생들은 우승하지 못했다고 돌아가지 않았다. 대회장 한쪽 방에 모여 한 방향으로 줄을 서서,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기차놀이를 하거나 춤을 췄다. 3일 동안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쌓은 우정을 나누려고 전자우편 주소를 교환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킴블은 “SNSB는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학생들이 모여 편견 없이 친구가 되고, 소셜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자리로서 의미도 크다”고 했다.
워싱턴/김청연 기자 carax3@hanedu.com
눈으로 보기만 하면서 공부한다
그래선 단어를 들어도 모른다
소리와 철자의 관계를 알면
좀더 효율적이다 “Can I have the definition?”(정의를 알 수 있을까요?) 무대에 선 학생이 출제자에게 물었다. 2000여 객석이 3분의 2 이상 찼지만 대회장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A branch of science dealing with the relations between climate and periodic biological phenomena.”(생물학적 현상과 기후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과학의 한 분과) 자크 베일리 박사(미국 버몬트대 고전학 교수)가 긴 문장을 단숨에 읽자 한 학생이 침착하게 발음했다. “p(피), h(에이치), e(이), n(엔), o(오), l(엘), o(오), g(지), y(와이), 페널러지!” 지난 5월29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 게일로드 내셔널 리조트 앤 컨벤션센터. ‘2013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Scripps National Spelling Bee, 이하 SNSB) 예선 3라운드 현장에서 리시(13·부산국제외국인학교 중학 2학년)가 ‘phenology’(계절학)의 철자를 맞히는 순간이었다. 인도계 미국인 리시가 목에 건 이름표에는 ‘SEOUL. SOUTH KOREA’라고 적혀 있었다. 관중석에선 리시처럼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한국 학생 다섯이 환호했다. 아쉽게도 리시는 준결승까지 진출하지 못했지만 한국 대표인 자신을 응원하러 온 한국 친구들과 끝까지 대회를 즐겼다. 스펠링비는 단어 발음을 듣고, 철자를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맞히는 철자 맞히기 대회다. 올해 86회째 열린 SNSB에서는 미국 전역과 세계 10여 나라에서 진행한 대표 선발전을 통해 뽑힌 281명이 세계 우승 트로피를 놓고 경쟁했다. 대회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인종과 성별 등에 구애 안 받고, 언어로 친목을 다진다’는 점이다. 리시가 한국 대표로 나간 건 예선이 열리는 국가에 거주하면 국적과 관계없이 그 나라 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리시는 “미국에 살던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대표로 지역대회에 나갔었다. 2011년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따라 울산에 왔는데 한국에서도 대회를 나갈 수 있게 돼 감사하다”고 했다.
왼쪽 뒤부터 시계 방향으로 한국 예선 입상자이면서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 참관단으로 참여한 김도엽, 장우혁, 박재영, 이성준군, 오승원양, 올해 우승자 아르빈드 마한칼리, 올해 한국 대표 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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