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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제시문의 단순 요약은 ‘비교·분석’이 아니다

등록 2013-05-06 10:45수정 2013-05-06 10:46

수시논술 ‘숨은 해법’
■ 비교하기의 정석

통합교과 논술 유형 중 ‘비교하기’ 비율은 대략 30%에 달한다. 한 대학의 논술 문제가 보통 2~4문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거의 모든 대학에서 비교 유형이 출제되는 셈이다. 따라서 비교하기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입 논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 비교는 둘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을 견주어 서로 간의 공통점(유사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설명 방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공통점을 강조하는 것은 비교이고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은 대조다. 그러나 넓게 볼 때 공통점과 차이점을 견주는 일 모두 비교의 개념에 포함된다.

비교하기 답안 중 감점당하기 쉬운 글은 요약에 가까운 비교다. 답안 분량이 부족하다 싶으면 학생들은 그때부터 중언부언 요약을 시도하거나 앞서 언급한 내용을 반복 정리한다.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비교 유형의 답안을 쓸 때는 단순 요약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비교는 요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약은 독해력에 기반한 기본형 글쓰기다. 따라서 핵심어와 핵심 문장을 추출하고 논리적 순서를 고려하여 내용을 재구성하면 요약이 완성된다. 하지만 비교는 분석력에 기반한 응용형 글쓰기이다. 그러므로 둘 이상의 제시문을 분석적·대조적으로 독해해야 밀도 있는 비교를 할 수 있다.

비교 유형의 문제를 접하면 독해의 단계에서부터 비교 기준 설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급선무는 공통주제를 찾는 일이다. (제시문 독해의 구체적 방법은 지난 4월29일치 참고) 공통주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공통주제가 반드시 완결된 문장이나 명제의 형태를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재·대상·상황을 고려하여 이를 일반화하면 공통주제를 추출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비교 기준을 설정해서 공통점을 서술해야 한다. ‘공통주제’와 ‘공통점’은 다른데, 일반화된 상위의 개념이 공통주제라면 공통주제의 하부 구성 요소가 공통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과와 배를 각각 설명하는 제시문이 있을 때 이들의 공통주제는 ‘과일(의 특성)’이고 공통점은 ‘맛이 달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이 비교는 두 제시문에 ‘맛에 대한 설명’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며 이때 공통점의 기준은 ‘맛’이 된다.

차이점을 비교할 때는 기준 설정에 더욱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엉터리 비교가 된다. ‘사과는 빨갛고, 배는 노랗다’라는 문장은 차이 비교이지만 ‘사과는 빨갛고 배는 달다’라는 문장은 대상들을 분석·설명하는 기준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비교가 아니다. 요컨대 차이 비교는 서로 다른 둘 이상의 대상을 동일한 기준(범주)으로 견주어 설명하는 일이다.

깊이 있는 비교를 위해서는 비교 기준을 평소 다양하게 설정해서 분석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사과와 배를 비교할 때는 맛·색깔·껍질의 형태나 모양 등이 비교 기준이 될 수 있다. 단, 비교 기준은 ‘논제’와 ‘공통 주제’를 벗어나는 지엽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가령 사과나 배의 개화 시기, 수확 시기, 당도 향상 방법 등의 세세한 기준이 전체 주제와 관련 있다면 좋은 비교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비교를 위한 비교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 비교하기의 실전 2013 수시 기출문제(이화여대 인문계열Ⅰ)

‘무제한적 관용’이 필요할까?

2. 제시문 [다]와 [라]에 나타난 ‘관용’ 개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하시오.

(다) 관용(寬容)이란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을 존중하고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이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 또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 조건이다. 나아가 관용은 모든 것을 관대하게 대하는 중립적 관찰자의 태도가 아니라 다른 존재 안에서도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관용은 어떤 인간도 결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과 모든 사람은 자기 관점에 얽매일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관용의 범위에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면 관용의 정신 자체가 존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문제를 가리켜 ‘관용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아무 제약 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불러온다. 우리가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불관용의 습격으로부터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회와 관용 정신 그 자체가 파괴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천명해야 한다.

물론 합리적 논증과 공중(公衆)의 의견을 통해 불관용을 감독할 수 있다면 굳이 억압적인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은 합리적 논증을 제시하는 대신 다른 모든 논증을 비난하며, 다른 사람의 합리적 논증에 귀 기울이기보다 주먹과 권총을 사용하여 그에 대응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므로 관용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권리 또한 보장되어야만 한다. 살인, 유괴 또는 노예무역을 범죄로 간주하듯이 우리는 편협함과 박해를 선동하는 불관용 또한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

(라) 자유주의 사회를 넘어 만민법(Law of Peoples)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들이 그렇지 못한 사회의 시민들을 어느 정도까지 관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여기서 ‘관용’이라는 말은 상대방을 압박하기 위해 군사·경제·외교적 수단을 포함한 정치적 제재 조치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 아니라,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사회도 ‘만민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민사회의 구성원은 특정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데, 여기에는 시민성의 의무, 즉 다른 구성원들이 자신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합당한 근거를 제공해야 할 의무도 포함된다.

자유주의 사회는 우호 관계에 있는 모든 시민과 협력하고 그들을 원조해야 한다. 만약 모든 사회가 자유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강하게 내세운다면 정치적 자유주의를 통해 적절한 관용을 베푸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설혹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용인할 만한 방식으로 관용을 베푸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는 종교, 철학, 도덕 등 시민들이 지니고 있는 ‘포괄적 교리’(comprehensive doctrines)를 존중한다. 이러한 포괄적 교리가 합당한 ‘정의’와 ‘공적 이성’(public reason)의 관념에 부합되기만 한다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를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들 사회의 기본 제도가 정치적 권리와 정의의 특정한 요건을 충족시킨다면, 그리고 시민들로 하여금 만민사회의 합당하고 정당한 법을 존중하도록 한다면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그러한 사회를 관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하는 비(非)자유주의 사회를 ‘적정 수준의 사회’(decent society)로 부르기로 하자.

만약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들이 모든 사회로 하여금 자유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강요하고, 그렇지 못한 사회에 대하여 정치적 제재를 부과한다면 적정 수준의 사회는 적절한 정도의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회는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이는 적정 수준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적정 수준의 사회가 스스로 개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사회들을 만민사회의 선량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들의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적정 수준의 사회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는 동시에 다른 사회의 시민들도 존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비록 적정 수준의 사회가 자유주의 사회와 동일하지도 않고 자유주의 원칙을 충분히 구현하지 못할지라도 이런 사회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는 서로 다른 사회의 시민들이 서로를 존중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만민사회의 핵심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 정석의 적용

비교 기준과 내용 도표로 정리해보자

서울 이태원 거리에 붙은 용산구청의 경고문. 쓰레기 무단투기 경고문조차 여러 언어로 써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 이태원 거리에 붙은 용산구청의 경고문. 쓰레기 무단투기 경고문조차 여러 언어로 써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 제시문 (다)와 (라)에 나타난 ‘관용’ 개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하시오.

일단 ‘관용’이라는 공통주제가 주어져 있으니 다행이다. 두 제시문 모두 ‘관용’ 개념을 정의한 뒤 관용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 관용의 범위와 한계 등을 서술하고 있다. (다)는 일상의 세계에서 관용의 덕목을 지키려면 그 범위와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라)는 정치체제의 관점에서 만민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제한적 관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둘의 공통점은 관용의 정의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즉 (다)(라)는 관용을 ‘다른 사고 방식과 행위 양식을 존중하고 승인하는 태도’라고 본다. 이는(다)에 서술된 내용이지만 (라)의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사회도 ‘만민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문장에서도 일반화할 수 있다.

둘은 관용의 ‘전제’가 다른데 이는 인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다)에 따르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그 불완전함은 관용의 주체나 대상(타자) 모두에 해당된다. 인간이 오류와 편견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관용이 필요한 것이다. (라)도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사회의 점진적 변화 가능성을 신뢰한다. 비자유주의적 인간도 스스로 만민사회의 선량한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으므로 이들을 배척하지 말고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제의 차이는 관용의 적용 범위나 한계, 관용의 효과에 대한 차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런데 답안을 작성할 때 이 비교 기준들을 파편적으로 나열해서는 안 된다. 기준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하며 하나의 논리적 체계를 이루도록 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 비교 기준과 그 내용을 도표의 형식으로 정리하는 습관을 갖추어야 한다. 자신이 정리한 도표를 보면서 내용의 서술 순서를 정하면 논리 정연한 비교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 예시답안

(다)(라)는 공통적으로 ‘관용’을 ‘다른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을 존중하고 승인하는 태도’라고 본다. 또한 두 제시문 모두 관용의 범위와 한계 설정 논의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둘은 관용의 ‘전제’를 다르게 설정하고 있다. 이는 ‘인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다)는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본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오류와 편견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주체와 타자 중 누가 옳은지 장담하기 어렵다. 따라서 관용이 필요한 것이다. (라)도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라)는 인간과 사회의 점진적 변화 가능성을 신뢰한다. 비자유주의적 인간도 스스로 만민사회의 선량한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으므로 이들을 배척하지 말고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제시문은 관용의 적용 범위에 대해서도 차이를 보인다. (다)는 무제한적 관용을 경계한다. 즉 관용을 수호하기 위해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관용의 범위는 합리적 논증과 공적 이성을 지닌 존재에 국한된다. 반면 (라)는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지향해야 할 관용의 태도를 언급하면서 제한 없는 관용을 주장한다. 즉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에도 관용을 베푸는 것이 만민사회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관용의 범위와 한계에 대한 인식 차이는 관용의 효과, 역할에 대한 차이로 이어진다. (다)에서 무제한적, 무차별적 관용은 관용 자체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라)에서 무제한적 관용은 비자유주의적 사회의 점진적 변화, 개혁을 이끌어 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정리해 보면 (다)(라)의 차이는 관용의 해석 태도가 다른 데 기인한다. (다)는 관용을 소극적·배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때 관용은 불관용이라는 대타적(對他的) 개념을 전제로 규정된다. 즉 ‘편협과 박해를 선동하는 불관용’의 대립 개념으로서의 관용이다. 반면 (라)는 관용을 적극적·개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관용 개념의 자기완결성에 주목하는 입장이다. 관용에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는 역설이 논리적으로 내포되어 있는데 (라)는 이 역설을 적극적으로 해석·수용하고 있는 것이다.(1075자)


■ 주제의 심층이해

논리적 사고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주장과 전제를 면밀히 검토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위 제시문 (다)는 ‘관용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불관용을 관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견 모순적 주장처럼 보이는 이 논증에서는 ‘관용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라는 문장이 ‘불관용을 관용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주장의 전제가 될 수 있다. 다음 제시문을 읽고 사형제도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다)와 동일한 논리 구조(전제와 주장의 형태)로 추론해 보자.

만약 사형 제도를 존속시키고 싶다면 적어도 본보기성을 빙자하여 합리화하는 위선은 삼가주었으면 한다. 이 처벌 제도는 사람들에게 광고하여 알리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형벌, 성실한 사람들이 성실하게 사는 한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지만 성실성을 포기한 자들에게는 매혹의 대상이 되고 그 일에 가담하는 자들을 타락시키거나 망쳐놓는 이 위협적인 제도를 에둘러 지칭하지 말고 사실대로의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이것은 물론 하나의 형벌이며 더욱이 신체적·정신적으로 끔찍한 형벌이지만 인간을 퇴폐적으로 만들 뿐 어떤 확실한 본보기도 되지 못한다. 벌을 가함으로써 살인 충동을 자극할 뿐 조금도 불상사를 예방하지 못한다. 사형 제도는 그 벌을 당하는 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제도다. 정신적으로는 수개월 내지 수년 동안, 육체적으로는 생명이 다하지 않은 채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 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인정하자. 사형은 분명 생명의 박탈이며, 범한 살인의 대가를 산술적으로 치르게 하는 형벌이다. (중략) 사형 집행은 살인 중에서도 가장 계산된 고의적 살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알베르 카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송남권 논술칼럼니스트
최규윤 강남비상에듀학원 인문논술강사
안덕훈 이원장 학습전략학원 논술강사
어수창 청솔교육연구정보원 인문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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