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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편식 독서, 때로는 보약 됩니다

등록 2013-05-06 10:06

좋아하는 분야·주제로의 반복 독서, 성취감 줄 수도 있어
잘 자란 편독광들, “강요 말고, 책 많은 공간에 데려가줘요”
“학습만화만 봐요.”

“중딩 큰애는 판타지 소설만 봅니다. 밥상머리에서까지 읽길래 한번은 밥상 엎을 뻔했네요.”

책을 읽지 않는 게 걱정? 책을 읽긴 읽는데 한 분야(장르) 또는 한 주제에만 치우쳐 읽는다는 걱정도 만만찮게 많다. 학부모들은 독서교육전문가들한테 “‘편식독서’(편독·偏讀)를 해도 되는 거냐”고 묻는다.

어린이도서연구회 문현주 상담실장은 “편독에 대한 걱정은 독서를 학습과 연관짓기 때문에 나온다”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부모들이 한 분야나 주제에 한정해 책을 읽다가 골고루 지식 섭취가 안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한다.

편독은 나쁜 걸까? 시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책을 읽는 방식에서 어른과 아이는 차이를 보인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만났을 때 주인공에게 충분히 감정이입을 해가며 사건을 경험한다.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 내용과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도 맛본다. 문 실장은 “이 과정을 겪으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단계로 올라간다”며 “좋아하는 분야나 주제에 한정해 책을 반복해 보는 건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다. 저학년 때 성취감을 느끼면 자신감이 붙고,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지식욕이 생겨서 더 다양한 분야를 찾는다. 근데 부모는 기다려주질 않는다”고 말한다.

경기도 고양일고 3년 이유민양은 조금 특별한 수험생이다. 많은 학생들이 학원에 목을 매지만 중간고사 기간에도 학원으로 향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도서관, 시험 기간에는 독서실을 이용하며 스스로 공부한다. 독서량도 많다. 얼마 전에는 <불편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읽었다. 고2 때부터 ‘도란도란’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명현학교라는 특수학교 학생들한테 찾아가 책을 읽어주는 봉사도 한다. 글을 읽고 쓰는 일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꿈도 많다. 문학, 법, 문화, 인권, 다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의 촉수를 들이댄다. 모두 책을 통해 꾸게 된 꿈이다.

“아동문학평론가, 한국어문학 교수, 비정부기구(NGO) 활동가 등을 해보고 싶어요. 이것 말고도 더 많습니다.”

얼핏 이양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한 ‘다독왕’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꽤 긴 편독 시절을 겪었다. 초2 때부터 판타지의 고전으로 불리는 미하엘 엔데 작품 등에 푹 빠져 지냈다. 이야기가 있는 책을 좋아했다. 만화, 판타지, 로맨스, 추리소설 등을 읽느라 “밥 안 먹냐?”는 소리도 들었다.

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도 좀 보라고 누군가 잔소리나 강요를 했으면 책을 아예 안 읽었을지도 모른다. 이양의 부모님은 독서에 특별히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단, 책이 많은 환경에 자주 데려가 줬다. 별거 아닌 듯 보이지만 중요한 활동이었다. 책에는 이야기책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파주어린이책잔치’나 책의 날 행사 등이 있을 때 많이 다녔었어요. 뭘 해주신 건 아니었어요. 알아서 놀았죠.(웃음) 그 덕에 책 자체가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모르는 게 생기면 책으로 해결하는 습관이 생겼다. 거기다 판타지, 추리소설 등 어떤 분야에 푹 빠져본 경험 덕에 맥락 이해력, 암기력, 집중력이 있었다. 어느 날, 중학교 사회 수업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관심은 자연스럽게 법 분야로 옮겨 갔다. 이양은 “법률용어가 나오는 사전 등을 읽으면서 지식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싹텄다”고 했다. 문 실장의 말처럼 ‘독서 성취 경험’이 ‘지식욕’으로 차근차근 확장된 셈이다.

“부모님이 ‘이거 읽어라, 저거 읽어라’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어떤 분야에 푹 빠져 있는 상태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불편해도 괜찮아>를 보면,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와요. 어느 나이 때 하고 지나가야 하는 방황들이 있어요. 애들이 편독하는 분야가 보통 학습만화, 추리소설, 로맨스 소설 등이거든요. 이것도 어릴 때 떼고 가야 해요. 도서관에 있는 모든 만화를 다 봤더니 어느 순간 시시해지더라고요. 부모님 입장에서 걱정이 된다면 아이가 원하는 거랑 부모가 원하는 걸 두 권 다 사는 거예요. ‘엄마는 이게 좋더라’ 정도로 얘기만 하고, 엄마가 진짜 재미있게 보는 모습을 보여주면 언젠가는 볼걸요.”

홍익대 컴퓨터정보통신공학과 2년 김민겸씨는 동성고등학교 재학 시절, 주변 친구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이과다 보니 국어공부는 손에서 놓았었다. 그런데 고2 때 교내 백일장에서 2등을 했다. ‘4·19’, ‘바람’을 소재로 판타지를 가미한 작문을 했다.

김씨는 중2 때부터 무협판타지 마니아였다. 친구 소개로 판타지를 접했다가 재미가 붙었다. 시리즈를 다 읽은 뒤로 도서대여점을 드나들며 만화, 판타지 등을 빌려 읽었다. 잘 안 알려진 무협판타지도 있었고, <반지의 제왕> <트와일라잇> 등 비교적 대중적인 소설도 읽었다. 3년 동안 대여점에서 빌린 책만 해도 1300여 권이었다. 공부는 하는데 성적이 만족스럽게 오르지 않아 힘들던 때였다. 판타지 속 이야기는 용사가 나와 마왕을 잡고 성공하는 스토리로 끝났다. 일종의 대리만족이 됐다.

이양과는 달리 김씨는 책이 많은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독서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판타지 소설은 독해에 대한 자신감, 성취감을 느끼게 해준 첫 책이었다. 김씨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수의 남자아이들이 책을 공부할 때만 사용하다 보니 읽는다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일이 많다. 근데 판타지는 술술 익히고, 감정이입도 되더라”고 했다.

무협판타지에 대한 지독한 편애는 고2 때 변화를 맞는다. 더 이상 읽을 판타지가 없을 정도로 볼만한 건 다 본 때였다. 우연히 도서부에 들게 됐고, 학교도서관을 만났다. 처음으로 판타지가 아닌 여러 권의 책이 꽂혀 있는 걸 봤다. 이미 판타지를 1천 권 이상 읽은 뒤였다. 책장을 넘기는 행위가 어색하지 않았다. 서가 제일 앞에 꽂혀 있는 책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성장소설이었다. 김씨는 “그때부터는 성장소설에 빠져들었다”며 “대한민국 중·고교생 이야기를 그대로 담은 것처럼 내가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그 뒤로 다양한 분야에서 읽었어요. 도서대출 기록을 보니까 고3 때까지 교내에서 두 번째로 책을 많이 읽었더라고요.”

편독으로 잃은 게 있을까? 김씨는 “초등학교 때 읽는 판타지를 늦게 읽긴 했지만 판타지를 그렇게 읽지 않았더라면 성취감을 못 느꼈을 거고, 책 자체를 안 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즐거움으로서의 책읽기에 맛을 들여야 하는데 우리나라 교육 환경에서는 그런 기회를 많이 안 줘요. 판타지만 계속 봤으면 문제가 생겼을지도 몰라요. 운이 좋았죠. 학교도서관이라는 공간을 만난 덕분입니다. 만약 제 아들이 저처럼 편독을 한다면 서점에 데리고 가서 판타지를 사주겠어요. 원하는 걸 사주되 제가 도서관을 만난 것처럼 다른 책들을 자연스럽게 만나볼 공간에 데려가는 거죠.”

자녀가 편애하는 책 분야를 잘 들여다보면 지금 아이의 고민을 발견하는 단초도 찾을 수 있다. 보통 학생들이 편독하는 장르는 이야기책, 그중에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판타지성 이야기책이 많다.

서울 수도여고 1년 성효정양은 책을 좋아하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책이 많은 환경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다가 초6 때부터 중2 초까지 판타지에 푹 빠져 지냈다. 처음에는 해리 포터 시리즈로 시작했던 판타지에 대한 관심이 대여점 소설로까지 이어졌다. 김씨한테 무협판타지가 대리만족을 돕는 매체였다면 성양한테 판타지는 탈출구였다.

“중학교 올라가면서 공부가 어려워지는 느낌도 있었고, 중이병이 왔거든요. 그런저런 이유로 탈출구를 찾았었어요. 대여점에 있는 책은 다 봤을 정도로 빠져 지냈죠. 몰입독서로 중이병이 해결된 면도 있어요. 일종의 탈출구가 되거든요. 그 시기가 지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슬슬 빠져나오더라고요.”

성양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의 판타지 편독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지나치게 교육적 잣대를 들이대 오히려 화를 부르기 쉽다. 성양은 “친구 중에도 판타지를 좋아하는 애가 있었는데 부모님이 극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며 책을 아예 다 버리셨다. 그 친구는 그때 충격을 많이 받더라”고 했다.

“어른들이 어른 잣대로 무조건 싫은 티를 내고, 나쁘다고만 하는 건 오히려 나쁜 결과만 낳는 거 같아요. 도서관에서 책을 두 권 이상 빌릴 수 있잖아요. 한 권은 아이가 좋아하는 책, 다른 한 권은 그것과 다른 주제의 책 등을 빌려 보도록 하는 것도 좋죠. 서서히 발을 떼도록 도와주고 대화도 많이 하면 된다고 봐요. 특히 판타지류에 편독하는 친구들이 현실에서 뭔가 안 풀려서 상상의 이야기 속에 관심을 갖는 일이 많아요.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봐 주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편독을 경계해야 할 분야의 책도 있다. 독서교육전문가들은 학습만화를 손꼽는다. 문현주 실장은 “학습만화를 보면 굉장히 단편적인 지식을 던져주는 구조라 독서력을 향상시켜주지 못한다”며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이 학습만화 여러 번 읽고 잔지식을 중얼중얼거리니까 그 책으로 얻은 게 있다고 생각하고 방치한다”고 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아주 잡다한 지식만 담겨 있을 뿐이죠. 아이들이 안 했으면 좋겠다 하는 걸 고치게 하려면 어른이 방법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애가 어떤 책을 주야장천 보면 어른들도 그 책을 보세요. 내가 생각하는 장단점을 파악하고, 애들이 그걸 왜 보는지 이유를 물어봐주고, 타당한 면에 대해서는 칭찬해줄 필요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만 일단 애들한테는 본인이 읽는 걸 인정해주는 셈이 됩니다. 그 뒤에 ‘네가 이 정도 좋은 걸 찾아내는 건 네 능력이다’라고 말해주면서 ‘음식도 가려 먹는데 책을 마음의 양식이라고 했잖아. 이런 건 덜 봤으면 좋겠다’라고 가야겠죠.”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행위가 될 때 의미는 배가된다. <오늘 읽은 책이 바로 네 미래다> 등을 쓴 독서교육전문가 임성미씨는 “골고루 독서를 하면 좋겠지만 무조건 이것저것 사서 강요만 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가장 중요한 건 한 권이라도 누구와 어떻게 제대로 읽느냐는 것이다. 아이가 뭘 보는지 관심을 기울여주고 대화를 건네라”고 했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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