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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거친 말 몰아내고 ‘시적 발언’이 자리잡다

등록 2013-04-29 13:45

지난해 학급 문집(시집) <참새 떼>를 준비할 때의 부산 대양전자정보고(현 대양전자통신고) 2학년 디지털전자과 4반 학생들.
지난해 학급 문집(시집) <참새 떼>를 준비할 때의 부산 대양전자정보고(현 대양전자통신고) 2학년 디지털전자과 4반 학생들.
우리 반 학급 문집을 만들자! ③ 학급 문집 이렇게 엮었다

문학은 특별한 사람들만 즐기는 게 아니라는 생각 갖도록 힘써
조례·종례 시간에 시 낭송하며 좋은 시 만나는 기회 자주 만들어
초등학교 아랫반 시절, 할머니와 아버지의 밥상에 놓인 계란찜. 아버지가 내게 덜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는 고봉으로 꾹꾹 퍼 담은 아버지 밥그릇도, 아버지도 다 미워서 아버지를 겨냥하여 새총을 쏘듯 “아버지 밥그릇은 한라산!”이라고 내뱉었습니다. 묵묵부답인 아버지의 검은 얼굴을 향해 내가 쏘아 보낸 또 한 발의 화살, “아버지 밥그릇은 백두산!”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시적 발언입니다.

문학을 평상시의 생활과 괴리된 별종쯤으로, 고상한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독차지하여 가지는 물건 정도로 생각하는 세상의 형편 때문에 시적 발언은 우리들의 삶에서 더욱 멀어지거나 추방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년에 2학년 학급의 담임을 맡게 되었을 때 학생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그들 가까이, 그들의 생활 속으로 불러오고 싶었습니다. 학생들 입에서 날것으로 뱉어지는 거친 말들을 몰아낸 자리에 시적 발언이 들어서는 희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문학은 결핍을 표현하는 양식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꿈을 찾고, 연민과 슬픔의 가치를 깨달으며, 상상을 통해 가슴속에 용해되어 있는 기억들을 응집시키거나 새로운 심상을 생성해 내는 능력, 달리 말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 줄 요량으로 학생들의 시 짓기 활동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꽃밭에 다녀온 사람의 몸에 향내가 묻어오는 것은 마땅한 이치입니다. 스무 평 남짓한 교실에서 우리 학생들이 시를 읽고 지음으로써 앞으로 모질고 거센 세상에서 기품이 있는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왔습니다. 문집을 엮었다는 빛나는 경험에 힘입어 자신의 내면을 세밀히 살피고, 인간의 삶과 세계를 통찰하면서 제각각 삶을 찬찬히 완성해 가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학급 문집을 준비하면서 학생들 스스로 시를 지어 문집을 발간하기 위한 ‘준비운동’으로 두 가지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좋은 시를 만나는 기회를 자주 만들었습니다. 조례나 종례 시간에 다 함께 시를 낭송하기도 했습니다. 자치 활동 시간에도 학생들과 함께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시에 대한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떨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마땅히 문학 수업 시간도 시를 감상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다음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시를 맛보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5월에 열린 문학 수업 연구 때에는 ‘모둠별 시 낭송 수업’을 주제로 삼아 학습 지도 계획을 세웠습니다. 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에 교과서 바깥의 서정시를 찾아 더했습니다. 학급 학생들 모두 낭송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정해 함께하기의 기쁨과 연대감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우리 학급 학생들은 방과 후와 주말에 모둠별로 모여 연극, 동영상과 유시시(UCC) 제작, 낭송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낭송 준비를 했습니다. 낭송으로 하는 시 수업이 무척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따금 시를 어떻게 쓰는지 토막 강의를 했습니다. 학급 수업 시간에 시 쓰는 법을 가르쳐 준 동료도 있어 힘을 얻었습니다. 9월에 접어들자 약속한 대로 학급 학생들이 전자우편으로 자작시를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창비의 학급 문집 발간 지원 대상에 선정되었던 터라 마감일까지 학급 문집 누리집에 파일 탑재를 끝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감일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작품을 제출하지 않은 학생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출하지 않은 학생들을 독려하면서 원고를 교정하고, 뒤이어 그것을 두 번 세 번 점검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머리말을 쓰고 쪽 번호를 매기고, 차례를 만들어 편집을 마쳤습니다.

해가 바뀌고 지난 2월에 창비에서 택배로 부쳐 온 책을 받았습니다. 종례 시간에 번호 순서에 따라 한 명씩 교탁 앞으로 나와 자신이 지은 세 편 중 한 편씩을 낭송했고, 우리는 박수갈채로 학급 문집(시집) <참새 떼> 발간을 자축했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종례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얼굴을 벌겋게 달구는 녀석들인데, 이날 종례는 많이 더뎌도 다들 밝고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모두 시인입니다. 오늘 집에 가서 부모님께 우리가 만든 책을 보여드리고 맛있는 저녁을 사 달라고 하세요. 반장! 아니, 하 시인! 인사!” “고맙습니다!”

며칠 후 김미순 님(하상호 학생 어머니)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고맙고 웃고 웃고… 공감하고… 울고, 울고, 울고, ‘참새 떼’들, 작은 우주들, 잘되기를, 행복하기를, 자존감 높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하고 소감을 밝힌 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실행하지 못한 몇 가지 일이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마음을 할큅니다. 우리 학생들 스스로 좋은 시를 찾게 하는 것, 학생들 주도로 발간 회의를 진행하지 못한 것, 학부모들의 참여를 생각하지 않은 것.

올해 들어서는 시 쓰기를 위한 준비운동으로 문학 시간에 2학년 전체 학생들과 함께 ‘참새들의 시 낭송’이라는 토막 활동을 열어 가고 있습니다.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곡을 배경으로 학급 전체 학생들이 낭송을 한 후 한 명이 따로 한 번 더 낭송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위의 표는 그동안 내디딘 몇 개의 발자국입니다.

승자 독식의 경쟁 사회 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추락하고 있고, 풍요로워 보이는 일상 속에 대형 사건과 사고가 매복해 있는 위험 사회에서 우리의 생명은 크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쓰는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일은 큰 축복입니다.

서형오/부산 대양전자통신고 교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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