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8일 서울 중대부속중학교 2학년 9반 학생들이 ′2013 찾아가는 게임문화교실′ 수업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직접 게임을 해보고 있다.
‘2013 찾아가는 게임문화교실’ 시범수업 열려
잘 접하면 절제력 키우고 소통기회도 마련해
잘 접하면 절제력 키우고 소통기회도 마련해
“자, 이건 고대 인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차투랑가(Chaturanga)입니다. 말 네 개 색깔이 다 다르죠. 보병부대, 전차부대 등 각각 다른 군대들을 의미합니다. 이 게임은 이런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도구로 많이 쓰였어요. 차투랑가는 각각 동양, 서양으로 퍼져서 중국의 장기가 되고, 유럽의 체스가 됐죠. 다음은 바둑입니다. 바둑은 엄마들이 머리 좋아지라고 많이들 가르쳐주죠?”
박혜진 전문강사의 질문에 여기저기서 ‘네!’ ‘나 저거 알아!’ 소리가 나온다. 지난 4월8일 오전 8시50분 서울 중대부속중학교 2학년 9반 교실. 박 강사가 세네트(Senet), 포커(Poker), 마작(麻雀) 등 역사 속 다양한 게임의 사진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을 덧붙이자 교실은 더욱 열기를 띠었다. 박 강사의 질문에 ‘전략게임’ ‘서든어택’ ‘스타크래프트’ 등 중간중간 자신이 아는 게임 용어를 말해보는 학생도 여럿 있었다.
이날 1교시에 진행한 이 수업은 ‘2013 찾아가는 게임문화교실’(이하 게임문화교실)의 2013년 첫 시범수업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 2012년부터 코리아보드게임즈가 시행하는 게임문화교실은 매년 전국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게임 관련 수업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게임을 건전한 문화로 만나면서 게임의 과몰입 현상을 예방하고 게임의 교육적인 효과를 높이자는 뜻에서 실시하고 있다. 2007년에 시작해 올해로 7년째 접어드는 사업이다. 매년 전국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학교나 학급 단위로 전문 강사를 파견하고, 무료로 수업을 진행한다.
“게임은 몸 건강, 정신 건강에 모두 해롭습니다.” “게임 많이 한다고 공부에 도움되는 건 없어요.” 흔히 교육현장에서 게임 및 인터넷 교육을 할 때는 이런 식의 가치판단을 하는 일이 많지만 이 수업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박 강사는 게임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식의 가치판단 대신 게임의 문화적 속성, 역사 등 게임의 객관적 정보를 먼저 소개하는 데 중점을 뒀다.
“중국에선 황제의 아들이 머리가 안 좋으면 바둑을 가르쳤습니다. 장기랑 체스에서는 왕이 있는데 바둑에선 왕이 없죠. 다 평등합니다. 내가 어디에 돌을 잘 놓느냐 잘못 놓느냐에 따라 몽땅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하죠. 이 게임은 전략게임 중 하나로 머리를 좋게 해줍니다.” 현대에 와선 게임이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두뇌에 나쁜 영향을 주는 놀이로 전락한 감이 있지만 학생들이 만난 역사 속 게임들은 두뇌 훈련을 위한 도구로, 종교적 의미를 담는 활동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많이 했던 보드게임 세네트는 당시 왕들의 무덤마다 한 개 정도는 넣어둘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게임으로 소개됐다. 박 강사가 “어떤 왕은 네 개 이상 넣어둘 정도였는데 이건 무슨 의미?”라고 묻자 학생들은 “그만큼 그 게임을 즐기고 좋아했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학생들한테는 금기어처럼 여겨지는 포커와 마작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한쪽에서 한 학생이 “그거 도박이에요!”라고 하자 박 강사는 “맞아요. 근데 이것도 엄연한 게임입니다. 게임을 잘못 사용한 사람들 때문에 잘못 전파가 되어 도박이라고 불리는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포커랑 마작도 원래는 머리를 좋게 하는 전략게임의 하나입니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이 어떻게 게임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문화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문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이용하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옛날 사람들이 하고 놀았던 게임의 유형, 몸을 쓰는 게임에서 머리를 쓰는 게임 등으로 발전한 게임의 역사 등을 만나본 뒤에는 실제 게임을 해보는 시간도 마련했다.
“띠링~띠링~”
9시10분쯤. 실제 실전 게임을 시작한 학생들 사이에선 종소리가 들렸다. 카드게임의 승자가 울리는 종소리였다. 학생들은 4~5명씩 모둠을 이뤄 ‘할리갈리 익스트림’이라는 게임을 실제 해봤다. 게임 참가자들이 내민 카드 중 같은 종류의 과일이나 동물 그림이 5개가 되는 경우, 종을 치는 식이다. 가장 빨리 종을 친 사람은 펼쳐진 모든 카드를 가져갈 수 있다.
이런 식의 오프라인 게임은 혼자서 하는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학생들한테는 생경한 경험이다. 게임을 함께 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순발력을 요구하는 일이 많고, 그림과 숫자 등을 맞혀야 하는 상황도 많아서 머리도 굴려야 한다.
학생들 입장에선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도 치며 그야말로 한판 놀 수 있다는 즐거움도 크다. 인용식군은 “온라인 게임을 할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오프라인 카드게임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을 하게 되더라. 그리고 친구들하고 얘기를 나누며 웃을 일도 생기는 거 같다”고 했다. 한상훈군은 “술 자체가 나쁜 게 아니고, 술을 먹고 나쁜 행동을 하는 게 잘못된 것처럼 게임이 나쁜 게 아니라 그걸 잘못 사용하는 게 나쁜 거라고 생각한다. 게임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게임이 제대로 된 문화로 인정받게 되면 좋겠다”고 했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게임’이 수업의 주제로 놓이자 평소 수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도 보였다. 담임 이정미 교사는 “평소 도드라지지 않았던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태도가 보여 반가웠다”며 “게임 분야는 아무래도 전문 분야다 보니 교사들이 직접 접근하고 강의하기 어려운데 전문가를 통해 이론 수업도 듣고, 아이들이 몰입할 만한 활동도 이어져 만족스럽다”고 했다.
게임문화교실 수업을 계기로 학교 안에 게임 문화를 잘 만들어나가는 사례도 있다. 경기 양주 삼숭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은 5학년이었던 지난해 게임문화교실에 참여한 뒤 새로운 놀잇거리를 찾았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제기차기, 고누놀이 등을 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지난해 게임문화교실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프로그램을 신청했던 정석환 교사는 “그전엔 간단한 놀이를 할 수 있는 기구가 있어도 할 생각을 못했었는데 수업을 계기로 이런 게임, 놀이기구를 교실에 준비해놓고 실제 게임을 해보도록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쉬는 때를 이용해 전래놀이에서 하던 게임을 한다”고 했다.
지난해 정 교사가 게임문화교실 수업을 신청하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무료로 운영하는 게임 관련 수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담임을 맡아 지도했던 김아무개군이 떠올랐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게임을 줄줄 외우고, 쉴 새 없이 떠들던 친구였다. 정 교사네 학급 단위로 신청을 준비하면서 떠오른 말이 있었다. 평소 아이들이 컴퓨터, 스마트폰 게임을 너무 많이 해 걱정이라는 동료 교사들의 이야기였다. 전화 상담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한 결과 5학년 8개 반이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금 6학년이 된 김아무개군은 전보다 밝은 모습으로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정 교사는 “사실 수업 전엔 게임이라고 하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이용한 게임을 생각했다. 근데 건전한 오프라인 게임의 역사, 문화를 소개하고 직접 체험해보게 하면서 아이들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가도록 돕는 내용이더라. 게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고, 건전한 게임을 하면서 잘못된 문화를 바로잡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도 배웠다”고 했다.
올해 게임문화교실 사업은 5월에 시작한다. 사업을 주관하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쪽 김광열 대리(게임·차세대콘텐츠본부 게임문화산업팀)는 “2007년에 300여명으로 시작했는데 해마다 반응이 좋았다. 작년에는 16만명(1100여 개 학교)을 교육했다. 보통 게임이나 인터넷 중독 분야의 강의는 단순히 네티켓을 알려주거나 게임 하지 말자는 식의 내용이 많은데 이 프로그램은 게임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아이들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나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반응도 좋다”고 했다.
글·사진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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