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 광성중 1학년 2반이었던 학생들과 정부용 교사가 문집을 보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김청연 기자
학급문집 만들며 학급 공동체 이야기 모아
맞춤법 틀리면 어때, 진솔한 글쓰기가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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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에 나는 예쁘고 마음씨 고운 처자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직업은 사람을 웃기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일 혹은 심리쪽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자녀는 5남5녀 정도 나을 것이다.”
서울 환일고 2학년 정용석군이 지난해 ‘10년 뒤 내 모습’이라는 주제로 쓴 글이다. 이 글에는 맞춤법에 어긋난 부분(‘낳을’을 ‘나을’로 잘못 씀)이 있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실은 책자의 편집인들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 맞춤법에 어긋난 곳이 있을 수도 있다. 너그럽게 이해해달라”고 적었다. 이 책자는 지난해 정군이 속했던 1학년 5반의 학급문집이다. 문집에 실리는 글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등 형식에 제한이 없었다. 중요한 건 ‘용석이가 어떤 결혼을 꿈꾸고, 어떤 직업을 갖고 싶어하느냐’다.
“10년 후에는 키가 20~25센티 정도 클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내 소신을 숨기고 산다.” ‘처음 타 보는 타임머신’이라는 제목의 문집에는 이렇게 학생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미래부터 과거, 현재에 관한 글 그리고 친구들끼리 돌아가며 쓴 ‘롤링페이퍼’가 실려 있다. “코 좀 그만 파라.” “주말에 전화 작작해.” “첫인상 3초 일진.” 롤링페이퍼를 보면 고교 1년 남학생들만의 장난스러움도 느껴진다.
문집 제작은 담임 홍승강 교사가 먼저 제안했다. 홍 교사는 “밑줄 치고 외우는 방식의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스스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능력을 키워주고 싶었다”며 “문집을 통해 아이들이 일상의 이야기나 생각을 글로 표현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마침 출판사 창비에서 실시하는 ‘우리반 학급문집 만들기 캠페인’에 선정돼 문집 제작에 대한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QR코드 참고)
흥미로운 건 학생들의 주도적인 참여였다. 문집 제작을 위해 5명으로 이뤄진 문집준비위원회(이하 ‘문준위’)가 꾸려졌다. 문준위에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하게 하자’는 원칙을 세웠다. 전교회장, 대회 수상 경력이 있는 학생이 등장하는 교지가 아니라 이 학급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지면이 문집이기 때문이다. 강석현군은 “아침조회 등을 이용해 원고를 부탁한다고 권유를 했고, 안 보낸 경우에는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원고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했다.
학생들 스스로 움직이는 가운데 교사는 적절한 개입으로 문집 제작을 도왔다. 홍 교사는 “<넛지>라는 책을 보면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자유롭게 쓰도록 열어두고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방향이 어긋나면 개입을 해줬다”고 했다.
“조금 어설퍼도 아이들 스스로 준비했고, 일상이 담겨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서 믿고 맡겼습니다. 주입식 교육 아래서는 아이들이 지식의 소비자로 남게 되지만 이런 경험을 하면 지식의 생산자가 될 수 있죠. 그러면서 가능한 창의적인 경험들, 지적 탐구의 기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의미들도 중간중간 얘기해줬습니다.”
문준위가 반 구성원들에게 열심히 권유한 결과 35명 전원의 글이 모였다. 수학교사를 꿈꾸는 친구(강동균)부터 경찰을 꿈꾸는 친구(강석현)까지 학생들의 미래 모습과 사연은 다양했다. 사격부 선수여서 상대적으로 학급 활동을 많이 못하는 윤진원군도 대학 졸업 뒤 국가대표가 되어 상무에서 뛰고 있을 자신의 미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냈다. 한성규군은 ‘유희왕’(카드게임)이라는 독특한 취미에 대해 소개하는 글도 썼다. 문집은 이렇게 학생들이 평소 드러내지 않았던 자신을 알리는 장이었다. 덕분에 교사나 학생들은 평소 생활 태도만으로는 모르던 학급 공동체의 모습, 의외의 고민, 재능, 취미를 알아갔다. 한성규군은 “남자애들이고 쑥스러워서 그런지 꿈에 대한 얘기를 잘 안 한다. 우식이 같은 친구는 꿈이 없어 보였는데 문집 준비하면서 이 친구가 이루고 싶은 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다른 친구들 꿈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해준 시간이었다”고 했다.
몰랐던 친구 사연 접하며 공감 기회도
홍 교사는 “혼자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세상이라 공부 잘하는 학생만 주목받기 쉬운데 학급의 다양한 학생들의 생각, 재주 등을 엿볼 수 있고, 아이들끼리 서로 소통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고 했다.
“남부끄럽기도 한데 ‘이런 때도 있었지’ 하면서 예전 일도 생각할 수 있어 좋아요.”
지난 3월29일 서울 광성중학교의 한 교실. 지난해 1학년 2반이었던 학생 다섯 명이 모인 가운데 김현민군이 당시 만들었던 문집을 펼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종현군도 한마디 덧붙였다. “최호석이 쓴 시 보고 ‘얘가 이런 시도 썼네?’ 하면서 깜짝 놀랐었어요.”
이 학급의 문집은 생일파티, 수련활동, 체험학습 등 이 학급이 경험한 학교생활의 사진들로 시작한다. 정부용 교사는 “사진을 보면 처음과 다르게 아이들이 컸다”며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얼굴에서 시작해서 중학생다운 얼굴로 크는 게 사진에서 보인다”며 웃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님께’ ‘친구가 친구에게’ ‘내가 미래의 나에게’ 등으로 이뤄진 차례를 보면 이 학급의 문집에 참여한 사람이 학생이나 교사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정 교사는 “처음에는 다른 학교처럼 소설이나 시 등 수행평가로 냈던 작품들을 넣을까 했는데 평가를 위한 글들이라 그런지 정형화가 돼 있더라”며 “만들어 놓고도 의미가 없을 거 같고, 아이들한테 다시 해오라고 하기도 뭐해서 학부모님도 참여하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했다. 학부모들에게는 알림장을 이용해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이 학급의 문집은 학생, 학부모, 교사의 대화창구가 됐다. 정 교사는 “보통 학교의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부모님들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눈여겨보게 됐다”고 했다.
송인섭군의 엄마 안주희씨는 “아이가 사춘기도 오고 한창 ‘미운 중학생’ 짓을 해서 쓰기 싫었는데 마감 닥쳐서 썼다. 쓰다 보니 ‘우리 아들이 옛날엔 이랬지’ 하고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라. 아이의 소중함,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떠올려보게 됐다”고 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아들의 학급 친구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도 생겼다. 안씨는 “반에 게임을 많이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부모님이 쓴 편지를 보니까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었더라”며 “다른 집 아이까지 이해하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조성민군의 엄마 이명아씨는 “아이들이 엄마를 잔소리하는 아줌마로만 보다가 엄마의 글을 만나면서 엄마를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계기도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이씨는 “내가 어릴 땐 글짓기, 시화전 등 성적과 상관없이 글로 자신을 표현할 문화가 있었는데 요새는 많지 않다”고도 했다.
“요즘에는 글 한 편 써서 낸 것도 수행평가가 되잖아요. 학생부에 기록이 되면서 평생을 따라가죠. 어떻게 보면 그래서 일상이 도식화가 됩니다. 아마 이 문집이 교과 과목이나 수행평가였다면 이렇게 진솔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웃음)”
강원도 인제군 인제중학교 이영미 교사도 지난해 ‘34명 꿈쟁이들의 수다-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학생들과 문집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학생들은 문집을 위해 별도로 글을 쓰진 않았다. 이 교사의 수업 시간을 비롯해 자치활동, 체험활동 뒤에 아이들이 써둔 글을 이 교사가 잘 모아놓고, 이 가운데 문집에 쓸 만한 글을 골라 편집부원들이 편집을 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 입장에선 부담이 덜한 활동이었다.
이 교사는 학급문집을 “별도의 생활지도 프로그램이 필요 없는 훌륭한 학급운영의 한 방법”이라고 했다. 학교신문이나 교지 등은 학교 행사 위주로 소식을 담는 공식적인 발간물이어서 학생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담긴 어렵다. 학급문집은 속마음을 터놓고 생활 속 진솔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갈등도 해결될 수 있다.
평소 기가 세 보이는 행동을 많이 해서 여학생들 사이에서 친해지기 두려운 친구로 손꼽히던 한 여학생은 문집에 ‘칭찬하는 글쓰기’라는 주제로 반 친구 33명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가며 아이들의 장점을 적은 글을 냈다. 그 일을 계기로 이 여학생에 대한 아이들의 오해도 풀렸다. 이 교사는 “‘이게 문집 글쓰기의 힘이구나’ 싶었다”며 “요즘 학교폭력 때문에 교내나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많은데 문집은 어떻게 보면 교실 공동체 이름으로 아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놓는 장이다. 그 안에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소통로가 생긴다”고 했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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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문집은 학생들 개개인의 사연을 들여다보고, 학급 공동체끼리 소통로를 마련하는 매개가 된다. 사진은 지난해 학급문집을 만들었던 서울 환일고 1학년 5반 학생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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