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지난해 ‘몸’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마임 강의를 듣고 있다.(왼쪽 사진) 길담서원 제공
교사·학부모 권유로 인문학 만나게 돼
사회공부도 되고, 자아찾기도 가능해
사회공부도 되고, 자아찾기도 가능해
부산 금정여고 2학년 이원경양은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하루를 밀양에서 보냈다. 부산대 밀양캠퍼스에서 열리는 ‘인문고전독서교실’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 프로그램은 독서토론 동아리 담당교사의 권유로 참가하게 됐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씻고 준비한 뒤 8시에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밀양역에 도착하면 9시30분. 10시부터 강의를 듣고 직접 싸온 도시락을 먹은 뒤에는 모둠별 토론이 이어졌다. 모둠별로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 토론했던 시간이 이양한테는 참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양은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생각하게 해준 시간이었다”고 했다.
이 행사는 부산대 밀양캠퍼스의 점필재연구소가 경남 지역 교사들과 연합해서 만든 인문학 프로그램으로 올해로 4회째 열렸다. 프로그램 운영에 참여하는 사직여고 이도환 교사는 “수도권에서는 강사진도 많고, 프로그램도 다양하지만 밀양처럼 소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이런 혜택을 받을 길이 없다”며 “경남 지역 학생들한테 인문정신을 일깨워주자는 뜻에서 공교육 교사들과 점필재연구소가 함께 시작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삶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한테 인문학을 권유하는 세상이다. 청소년도 예외는 아니다. 이양처럼 지역에서 인문학 수업을 꾸준히 찾아 듣는 ‘청소년 인문학 마니아’도 등장한다. 전주 신흥고 2년 김한결군도 그런 경우다. 김군은 매년 전북환경운동연합에서 주최하는 ‘초록시민강좌’를 비롯해 여기저기서 열리는 인문학 관련 수업을 들으러 다닌다. 학원은 전혀 다니지 않는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남들이 학원에 갈 때 인문학 강의를 찾아 듣는 데는 이유가 있다. 김군은 “이런 수업을 통해 소통하는 자유를 맛보고 공부를 하는 데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군한테 인문학의 첫단추를 채워준 사람은 부모님이다.
“엄마, 아빠가 강의 듣는 데 관심도 많으시고, 책읽기에도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청소년들 곁에는 인문학에 관심 있는 학부모가 있다. 거창하게 인문학을 학문으로 배우거나 이런 수업을 강요하는 학부모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청소년들 곁에는 책, 토론, 사회문제 등에 관심을 두고 ‘혹시 이런 수업 한 번 들어볼래?’라고 권유하는 부모가 있다.
서울 중앙고 2년 이현범군은 통인동에 있는 길담서원의 ‘청소년인문학교실’에 참여했다. 길담서원에 자주 드나들던 어머니를 따라 이 공간을 찾았다가 강좌가 열린다는 말에 수업을 들었다. 김군은 “인문학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길담서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좋아서 다니다가 인문학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길담서원은 책방이면서 문화공간이다. 청소년인문학교실은 일 년에 3,4회 정도 열린다. ‘길’, ‘일’, ‘몸’, ‘집’, ‘품’ 등 한 단어로 이뤄진 주제를 놓고 그 주제로 6,7명의 강사가 나서 강의를 한다. 강의는 책으로도 묶여 나왔다. 이재성 학예실장은 “서원지기인 박성준 선생님과 회의를 하다가 우리 삶과 연관된 말,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말은 다 한 글자로 이뤄져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한 글자로 된 인문교실을 생각했다”고 했다. 2008년 말에 시범으로 강좌를 열어본 뒤 2009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청소년인문학교실의 특화된 점은 기획에 청소년이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실장은 “청소년은 늘 교육의 소비자처럼 여겨졌는데 청소년이 교육의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에서 청소년이 기획회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강의를 들은 뒤에는 토론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이 이어진다. 캠프를 떠날 수도 있고, 모둠별로 다양한 활동도 한다. ‘품’을 주제로 강연을 들은 뒤 한 모둠은 청소년교육공동체 ‘나다’를 찾아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학생들이 인문학 수업을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육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교육의 주체가 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인문학 강좌에 맛을 들인 학생들한테는 공통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내 얘기를 할 수 있고, 숨이 트인다. 천천히 넓게 생각하게 해준다”고 입을 모은다.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에 참여한 서울 상계중학교 3학년 이고은양은 “그전에는 학교공부만 알았는데 이런 수업을 들으면서 숨통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학교수업은 시험 위주로 진도를 나가기 때문에 깊게 천천히 인문학 공부를 하긴 어렵잖아요. 그런 기회가 적은 것 같아서 혼자 인문학 강좌를 찾다가 오게 됐어요. 수업을 들으면서 어떤 부분에 대해 천천히 곱씹어볼 기회가 생겨 좋습니다.”
부산 금정여고 이원경양이 도시락을 싸서 밀양까지 다닌 이유도 인문학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이양은 “인문학 강좌를 들으러 가면서 학교공부만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스펙 때문에 참여하는 친구들 아쉬워
“학교에서 토론식 수업이 있을지 모르지만 의외로 말할 기회가 많지 않거든요. 특정 수업 시간에 주제를 정해주고, 찬반을 이미 정해놓고 논리에 맞게 말하는 식의 활동은 했지만 그것과 인문학 수업의 토론과는 다르더라구요. 저를 편하게 드러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항상 대학을 목표로 놓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이런 강좌들을 보면 대학, 성적이 아니라 사람 자기 자신, 꿈 등 주변 것들에 대해서 말을 해줍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죠.”
인문학 강의는 학교 수업에서 제목이나 지은이만 만나보고 지나쳤던 책들을 천천히 읽어보는 즐거움도 맛보게 해준다. 남산강학원의 인문학 수업은 고전이라 불리는 인문학 텍스트를 놓고 함께 읽고, 토론하고, 글을 써보는 식으로 꾸려진다. 경기 과천여고 2학년 신지윤양은 “학교수업은 일방적으로 앉아서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하는 식인데 인문학 수업에서는 책을 읽고,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고, 글을 써보는 방식이라 좋았다”며 “말로만 듣던 어려운 책들을 다른 사람들과 천천히 읽어볼 기회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장자>, <월든> 같은 책들은 유명한 책들이지만 혼자서 읽을 엄두가 안 나잖아요. 그걸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얘기하는 게 재밌더라구요. 제가 어렵다고 느낀 부분은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어렵다고 느끼던데 그런 부분들을 얘기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히는 것 자체가 좋습니다.”
최근의 인문학 강좌들은 사회 이슈 등 일상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현실맥락적인 인문학 공부를 돕기 때문에 학생들한테 친밀하게 다가온다. 그런 이유로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와 세상을 둘러보고, 진로탐색을 하는 청소년도 나온다. 서울 중앙고 이현범군은 “2년 동안 길담서원의 청소년인문학교실에 참여하면서 나이는 어리지만 나름대로 내 가치관이나 생각 등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지 돌아보게 됐고, 나 나름대로 꿈도 꾸게 됐다”며 “약자의 편에 서 있는 변호사가 되는 게 지금 꿈이다”라고 했다.
인문학 강좌들이 청소년의 일상 가까이 들어오고 있지만 누구한테나 열려 있는 인문학 강좌의 대상을 학생들 스스로 제한해버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전주 신흥고 김한결군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가 많아졌지만 아무래도 고교생들은 입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인문학은 그냥 공부 잘 하는 애들이 스펙을 쌓으려고 듣는 강좌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성적이 떨어지는 친구들은 이런 걸 들어봤자 대학교에서 쳐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 기피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인문학 강좌라고 하면 제법 머리 있는 애들이 듣는 강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산 금정여고 이원경양은 “인문학은 사람으로서나 학생으로서나 당연히 만나봐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며 “하지만 요즘 대학들이 인문학을 강조하다 보니까 제대로 듣기보단 자기 이력에 한 줄 추가하려고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경향도 있다”고 했다.
인문학 강좌가 늘고 있는 때 프로그램의 방향성이나 질에 대한 고민도 해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사직여고 이도환 교사는 “4,5회 정도 열리는 일반 인문학 강좌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지도 의문”이라며 “그런 뜻에서 학교 독서토론동아리 학생들과 한 사람을 알더라도 확실히 알고 가자는 의미로 전반기에는 연암 박지원, 후반기에는 시인 김수영에 대해 연구하는 활동을 했다. 하지만 대다수 학생들이 수능 공부를 하는데 왜 이런 걸 하냐는 분위기라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최근 2,3년 사이 학교에서도 인문학 관련 행사를 많이 여는 움직임이 보입니다. 단위 학교마다 이런 붐이 이는 건 좋지만 충분한 목적의식을 갖고 가야할 텐데 마치 반짝 유행을 타고 지나가는 건 아닌지 질적인 부분에서도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입시경쟁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되고, 학교가 교육방송 문제풀이 공화국처럼 된 상황에서 독서토론 동아리를 하고,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생들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책임감도 느낍니다. 이런 환경이라 학교에서 여는 인문학 강좌도 반별로 몇 명씩 할당해서 오는 식이 되곤 합니다. 열악한 공교육 환경에서도 소수지만 인문정신을 제대로 알려주려고 고민하는 사례가 늘고, 그런 사례들이 많이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와 부산· 울산·경남 지역 교사들이 함께 만드는 ‘인문고전독서교실’에 참여한 학생들이 토론을 하고(오른쪽 위 사진), 글을 쓰는(아래 사진) 모습이다. 사직여고 이도환 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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