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6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백석고 학생들이 방과후학교 수업의 하나로 디베이트를 벌이고 있다. 정종법 최화진 기자
“간접광고는 구매 욕구를 자극해 소비를 부추깁니다.”
“그러나 소비가 증가하면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요.”
“상품이 시청자에게 불필요하게 노출돼 내용 전개가 억지스러워집니다. 결국 방송의 질이 떨어져요.”
“방송의 질이 떨어진다고 주장한 사례가 있나요? 오히려 제작비를 확보하기 쉬워 프로그램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슈퍼스타케이3>을 볼 때 심사위원석에 놓여 있는 특정 음료수에 자꾸 눈이 갑니다. 이런 상황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많다는 객관적 근거나 정확한 통계자료가 있습니까?”
중학생답지 않은 날카로운 질문
지난 19일 오후 4시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명덕여자중학교 2학년 한 교실. 수업이 끝난 뒤였지만 교실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간접광고를 허용해야 할까’를 주제로 디베이트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베이트는 특정 주제를 놓고 찬반으로 팀을 나눠 서로 토론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날 방과후 수업에는 찬반으로 3명씩 조를 나눈 두 팀과 판정단 5명, 모두 11명이 참여했는데, 1~3학년 학생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디베이트는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나고 방과후학교로 시작됐다. 수업 첫머리에 한겨레 통합교육원 디베이트 전임연구원 노미진 강사는 주제와 관련한 배경지식을 설명했다. 앞 시간에 미리 토론 주제를 알려줘 몇몇 학생은 자료를 찾아 준비해왔다. 그러나 찬반팀은 나누지 않았다.
노 강사는 “학생들이 찬반 주장을 모두 고려해 자료를 찾도록 유도하기 위해 찬반팀을 미리 나누지 않았다”며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뿐 아니라 반대 주장과 근거, 사례까지 알아야 반론을 효과적으로 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간접광고와 관련한 강사의 배경지식 설명이 끝났다.
학생들은 직접 찾은 자료와 방과후 학습을 위해 따로 제작된 교재를 바탕으로 토론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다양한 주장과 의견을 모으고 반박할 재료까지 챙기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학생들의 표정이 매우 진지해졌다. 찬반팀은 동전 던지기로 정했다. 이후 입론, 반박, 요약, 최종변론 등으로 역할을 나눴다. 팀원들은 토론의 전개방향까지 예측하면서 작전을 짰다.
토론 시작. 자신의 주장을 밝히고 근거를 대는 입론 시간으로 각 팀에 주어진 시간은 겨우 4분. 그러나 찬반 양쪽 발표자가 시간을 모두 쓰지 못했다. 일상생활에서 4분은 짧다. 그렇지만 특정 주제와 관련해 논리적인 발언을 4분 동안 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반론 시간에는 양상이 달라졌다. 입론에서 부족했던 점을 보충하려는 듯 반박 시간은 상대방에게 주장의 근거를 묻거나 통계자료를 대라는 등 날카로운 질문들이 오갔다. 이런 상황은 입론, 반론(각 4분)에 이은 ‘교차질의(3분)→요약(각 2분)→전원교차질의(3분)→최종변론(2분)’까지 계속됐다.
‘간접광고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가 승리
토론이 끝난 뒤엔 승패를 갈랐다. 토론자로 참석하지 않은 나머지 학생 5명이 판정한다. 간접광고를 허용해선 안 된다는 쪽이 이겼다. “토론을 마친 뒤 굳이 판정을 내려야 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노 강사는 “판정하는 과정도 훌륭한 학습”이라며 “양쪽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분석·비판하는 훈련을 할 좋은 기회”라고 설명했다.
반대 쪽이 우세했다고 판정한 정민희(명덕여중3)양은 “찬성 쪽 토론자가 반대 쪽에서 근거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다시 얘기해주세요’라고 요청했다”며 “경청 자세가 부족해 보여 점수를 깎았다”고 말했다. 무승부라고 판정한 또다른 학생은 “양쪽 다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며 “그렇기 때문에 근거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대응하려 한 모습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시간제한을 꼭 둬야만 하는가”란 질문에 노 강사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말하는 훈련을 해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며 “많이 읽고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고 쓰기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창 예민한 나이인 여중생들은 디베이트에서 진 뒤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승패에 개의치 않았다.
찬성 쪽 토론자 김시윤(명덕여중2)양은 밝은 얼굴로 “주장하려 했던 내용과 근거를 다 말했다”며 “졌지만 의견을 나누며 사고력을 키운 것 같아 유익하고 재밌었다”고 답했다.
어떤 학습이든지 즐겁게 수행할 때 기대한 효과 이상을 얻는다는 건 교육 상식이다. 이런 면에서 이날 디베이트에 참가한 학생들은 충분한 학습 효과를 거둔 셈이다.
학부모 가운데에는 디베이트가 비교과과목이어서 학교 성적에 도움이 될지 의심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기우다.
13년째 일선 학교 현장에서 디베이트 수업을 하고 있는 황연성 교사(서울 예일초등학교)는 “디베이트 준비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기주도학습력을 기르고 토론을 하면서 보람과 성취감을 얻는다”며 “디베이트는 학습 의욕과 자신감을 갖게 해 고등사고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학습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했다.
방과후학교 토론 수업 확산
디베이트는 찬반팀을 나눠 정해진 규칙에 따라 토론을 진행한다.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엄격한 형식을 지켜야 하는 디베이트는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다. 그러나 토의·토론의 교육적 효과가 드러나면서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으로 디베이트(토론) 수업을 채택하는 학교가 조금씩 늘고 있다.
이번 학기부터 새롭게 디베이트 수업을 채택해 진행하는 명덕여중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창의경영학교로 선정한 사교육절감형 학교다. 명덕여중은 자기주도학습과 학교교육 강화 등 사교육비 경감 모형을 퍼뜨리기 위해 방과후학교를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명덕여중은 지난 학기에 전교생 700명 가운데 47%인 329명의 학생이 방과후학교에 참여해 모범사례로 꼽혔다. 김인종 명덕여중 교장은 “최근 사교육비 부담에 학부모들의 어깨가 무겁다”며 “학교가 나서서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명덕여중은 현재 지난 학기보다 6학급이 늘어난 총 24반의 방과후학교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교장은 ‘언어 구사력’을 미래를 이끌 인재의 주요한 특성으로 지목했다. 그는 “디베이트는 교과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비교과과목이지만 말하면서 체계적으로 지식을 구조화할 수 있는 수업이라서 채택했다”며 “장기적으로는 학습에 도움이 될 것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 교장은 “이번 디베이트 수업이 좀더 활성화돼 토의·토론 수업을 학교 현장에 정착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디베이트에 참여했던 학생들도 디베이트의 효과에 긍정적이었다. 정민희양은 “수업 시간에 발표할 기회가 많다”며 “평소 디베이트를 하면서 익힌 ‘주장한 뒤 근거를 대는 말하기’를 연습한 덕에 발표할 때에도 논리적으로 사고한 뒤 말하려 한다”고 답했다. 김시윤양도 “비판적 사고가 길러져 국어나 사회 과목을 공부할 때 도움이 된다”며 “특히 국어 과목을 공부하면서 논설문과 설명문을 많이 읽는데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으로 읽으려고 노력하게 됐다”고 밝혔다.
방과후 학습 진행 때 유의할 점은 없을까? 방과후 학습을 총괄해 관리·감독하는 조송옥 명덕여중 교사(도덕)는 “방과후학습반을 잘 꾸려가기 위해선 검증된 실력을 갖추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지도할 수 있는 강사여야 한다”며 “가능하면 학교 안의 교사가 책임지고 지도하면 좋지만, 인력이 부족하거나 자체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일부 과목에 한해서는 신뢰도 높은 기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채택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조 교사는 “디베이트는 기존 학교 현장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참신한 학습 방식”이라며 “교육적 효과가 분명하게 입증된다면 사교육비를 절감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종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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