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21 /
[난이도 수준-중2~고1] “지금 바로 써라.” 저급 유머를 구사해보았다. 누군가 나에게 “우리글을 바로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그렇게 대답하겠다. 지금 바로, 그러니까 ‘당장’ 쓰라는 이야기다. 실전을 자주 체험해야 ‘바로 쓰기’(옳게 쓰기)에 필요한 구체적인 팁들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각에 담을 수 있다. 오늘은 ‘바로쓰기’에 관하여 몇 마디 하련다. 내 기억으로는, 1980~90년대엔 우리글의 오염도가 페놀을 방류한 낙동강 수준이었다. 지금도 외래어가 차고 넘치는 현실이지만, 어설픈 번역어투의 글은 그때 가장 창궐했다고 본다. 난독증을 부르는 외국 소설과 사회과학 서적들이 많았다. 문맥이 뒤엉킨 영어식 만연체나 일본어투를 여과 없이 가져온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이 지식인의 언어인 양 잘난 척을 하던 시대였다. 그 암울한(!) 때에 나온 보석 같은 책이 고 이오덕 선생(1925~2003)의 <우리글 바로쓰기>(1989)다. ‘개안’(開眼)이라는 표현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글 바로쓰기>는 어린 시절 글쓰기에 관해 큰 깨우침을 주었다. 그 뒤부터 솔직하지 않은 ‘글짓기’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되도록 입말을 옮겨야겠다고, 어색한 한자어는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분별하게 사용해온 외래어들도 돌아보았다. 그 영향 탓인지 지금도 ‘~에 있어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다름아니다’ 따위의 표현들은 쓰지 않는다. 주변의 문화센터 교열강좌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봐도 대개 이러한 이오덕 선생의 문제의식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다. 그분에게 ‘땡깡’을 부려본다. “선생님은 100% 다 옳습니까?” 그렇지는 않으리라. 세상에 절대적 권위란 없다. 개인적으로는, 다음 세 가지에 관해서 이오덕 선생의 주장에 강력히 반(反)한다. 첫째는 ‘그녀’고 둘째는 ‘입장’이며 셋째는 ‘진검승부’다. 셋 다 일본말이거나 일본 역사와 관련됐다. ‘그녀’는 가노조(彼女)를 그대로 옮긴 말이라고 한다. 그냥 ‘그’만이 옳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왔건 아프리카에서 왔건 ‘그녀’가 더 좋다. ‘그녀’가 드러내는 여성스럽고 섬세한 느낌을 사랑한다.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입말은 아니지만, 책에서 볼 땐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입장’ 역시 ‘다치바’(立場)에서 왔다. ‘처지’ ‘태도’ ‘생각’ ‘선 자리’로 바꾸라는데 난감하다. ‘입장’은 그냥 ‘입장’이다. 이보다 더 뜻이 분명하게 함축된 단어가 없다. 김건모의 노래 <핑계> 가사를 이렇게 바꾼다고 생각하니 마음까지 아프다. “처지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진검승부’는 일본 사무라이 일대일 대결의 역사가 스며 있다. 그럼 로마제국시대 콜로세움의 검투사 승부라면 괜찮은가. ‘전투적 용어’라는 비판이 있지만 ‘진검승부’만이 주는 비유의 힘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이오덕 선생이 제시한 우리글 바로쓰기의 철학과 지침은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책을 읽고 글쓰기의 중심을 잡았으면 좋겠다. 다만 이제는 외국말에 대한 똘레랑스도 추가로 갖추었으면 좋겠다. 한자어로 뒤범벅된 글을 쓰면 읽기 흉하지만 한자어의 압축성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날렵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 우리말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일본말이라면 적극적으로 빌려 써도 된다. 그게 사대주의는 아니다. 우리말이 아름다운 것처럼 일본말도, 한자어도, 영어도 다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난이도 수준-중2~고1] “지금 바로 써라.” 저급 유머를 구사해보았다. 누군가 나에게 “우리글을 바로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그렇게 대답하겠다. 지금 바로, 그러니까 ‘당장’ 쓰라는 이야기다. 실전을 자주 체험해야 ‘바로 쓰기’(옳게 쓰기)에 필요한 구체적인 팁들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각에 담을 수 있다. 오늘은 ‘바로쓰기’에 관하여 몇 마디 하련다. 내 기억으로는, 1980~90년대엔 우리글의 오염도가 페놀을 방류한 낙동강 수준이었다. 지금도 외래어가 차고 넘치는 현실이지만, 어설픈 번역어투의 글은 그때 가장 창궐했다고 본다. 난독증을 부르는 외국 소설과 사회과학 서적들이 많았다. 문맥이 뒤엉킨 영어식 만연체나 일본어투를 여과 없이 가져온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이 지식인의 언어인 양 잘난 척을 하던 시대였다. 그 암울한(!) 때에 나온 보석 같은 책이 고 이오덕 선생(1925~2003)의 <우리글 바로쓰기>(1989)다. ‘개안’(開眼)이라는 표현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글 바로쓰기>는 어린 시절 글쓰기에 관해 큰 깨우침을 주었다. 그 뒤부터 솔직하지 않은 ‘글짓기’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되도록 입말을 옮겨야겠다고, 어색한 한자어는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분별하게 사용해온 외래어들도 돌아보았다. 그 영향 탓인지 지금도 ‘~에 있어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다름아니다’ 따위의 표현들은 쓰지 않는다. 주변의 문화센터 교열강좌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봐도 대개 이러한 이오덕 선생의 문제의식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다. 그분에게 ‘땡깡’을 부려본다. “선생님은 100% 다 옳습니까?” 그렇지는 않으리라. 세상에 절대적 권위란 없다. 개인적으로는, 다음 세 가지에 관해서 이오덕 선생의 주장에 강력히 반(反)한다. 첫째는 ‘그녀’고 둘째는 ‘입장’이며 셋째는 ‘진검승부’다. 셋 다 일본말이거나 일본 역사와 관련됐다. ‘그녀’는 가노조(彼女)를 그대로 옮긴 말이라고 한다. 그냥 ‘그’만이 옳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왔건 아프리카에서 왔건 ‘그녀’가 더 좋다. ‘그녀’가 드러내는 여성스럽고 섬세한 느낌을 사랑한다.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입말은 아니지만, 책에서 볼 땐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입장’ 역시 ‘다치바’(立場)에서 왔다. ‘처지’ ‘태도’ ‘생각’ ‘선 자리’로 바꾸라는데 난감하다. ‘입장’은 그냥 ‘입장’이다. 이보다 더 뜻이 분명하게 함축된 단어가 없다. 김건모의 노래 <핑계> 가사를 이렇게 바꾼다고 생각하니 마음까지 아프다. “처지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진검승부’는 일본 사무라이 일대일 대결의 역사가 스며 있다. 그럼 로마제국시대 콜로세움의 검투사 승부라면 괜찮은가. ‘전투적 용어’라는 비판이 있지만 ‘진검승부’만이 주는 비유의 힘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이오덕 선생이 제시한 우리글 바로쓰기의 철학과 지침은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책을 읽고 글쓰기의 중심을 잡았으면 좋겠다. 다만 이제는 외국말에 대한 똘레랑스도 추가로 갖추었으면 좋겠다. 한자어로 뒤범벅된 글을 쓰면 읽기 흉하지만 한자어의 압축성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날렵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 우리말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일본말이라면 적극적으로 빌려 써도 된다. 그게 사대주의는 아니다. 우리말이 아름다운 것처럼 일본말도, 한자어도, 영어도 다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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