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영화·만화·게임 ‘기계문명’ 뒤에
‘뛰어난 이야기꾼’ 시대 곧 도래
‘뛰어난 이야기꾼’ 시대 곧 도래
커버스토리 / 요즘 들어 세상 사람을 사로잡는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같은 전자 예술 갈래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 많다. 예술인이나 문화인은 말할 나위도 없고 정치인이나 경제인까지 그것이 돈을 만들어내는 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현상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런 전자 예술 갈래가 모두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야기가 그만큼 우리네 삶과 세상의 중심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세상을 좀더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은 지난 세기를 마무리하면서 이미 새로운 문명을 예감하며 이야기에 눈길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연과학을 바탕으로 기술자와 기능인이 이끌어온 기계문명은 이제 제 몫을 다하고 다음 문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문명은 인문사회 분야와 자연과학 영역을 아우르는 ‘뛰어난 이야기꾼’(그레이트 스토리 텔러)들이 이끌어갈 것으로 내다보았다. 아득한 옛날, 신화를 만들던 무당 같은 사람들이 새로운 문명의 주인공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런 즈음에서 나는 지난 세기 백년에 걸쳐 쑥대밭이 되어버린 우리 겨레의 이야기 터전에 눈을 떴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뒤로 일천삼백 년에 걸쳐 지배층이 중국의 아류로 떨어져 가는 동안 우리 이름 없는 백성들은 이야기 터전을 가꾸고 지키면서 꿋꿋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지난 세기에 일제의 야만스런 침략으로, 국토 분단과 남북 전쟁으로, 독재 정치와 분별없는 산업화로 그런 이야기 터전은 송두리째 망가졌다. 이제 이를 어찌 해야 하는가? 교육이 나서서 우리네 삶 안에 이야기를 살려내는 수밖에 없다. ‘이야기 주머니’라는 옛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고 주머니 안에 가두어두면 끝내는 이야기가 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망치려고 나선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살리는 길은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하여 부지런히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이야기판을 벌이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이 바뀌어 갖가지 전자매체로 마음을 주고받는 판인데 무슨 수로 이야기판을 만들 것이냐 하겠지만,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입말의 삶은 사람의 존재와 더불어 영원하다. 집안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도 영원하고, 일터나 배움터나 찻간이나 심지어 길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도 영원할 것이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망가져버린 우리네 이야기판을 어떻게 되살리느냐 하는 것이다. 이야기판만 되살려 이야기를 주고받도록 해주면 핏줄 속에 흐르고 있는 겨레의 이야기 능력은 머지않아 깨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유치원에서 비롯한 마주이야기교육, 청주의 한 연구소에서 불을 밝힌 마을공동체교육, 진주의 한 대학이 전국 국어교사들과 손잡고 벌이는 전국학생이야기대회 같은 움직임은 저마다 이야기판을 일구어가는 값진 길잡이들이다. 다가오는 문명도 이끌어야 하겠고, 앞날이 어두운 우리네 문화 산업도 일으켜야 하겠고, 겨레의 뛰어난 이야기 능력도 되살려야 하겠기에 우리는 지금 삶터 곳곳에서 이야기판을 일구는 교육으로 서둘러 눈길을 돌려야 한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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