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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영어지문의 뜻은? 방정식을 푸시오!” 논술·구술 탈 쓴 보고서

등록 2005-05-06 19:36



본고사 부활하나 - (상) 실태 살펴

교육부 묵인속 중·상위권대 대놓고 시행

서울대가 2008학년도 이후 입시에서 ‘논술형 본고사’를 중심으로 선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내신 위주라는 새 입시안의 기조가 흔들리고 있다. 현재 본고사형으로 치러지는 일부 대학의 심층면접과 논술이 확산되면서 과거 국·영·수 위주의 본고사가 전면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대학들이 논술과 면접이라는 이름으로 치르고 있는 사실상의 본고사와 그로 인한 폐해를 살펴보고, 바람직한 대학별 전형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3회에 걸쳐 알아본다.

“x에 관한 이차방정식 x2-2ax+2a2-8=0이 적어도 한 개의 양의 실근을 갖도록 하는 실수 a의 범위를 구하시오.”
“직선 y=x+2와 포물선 y=x2의 두 교점을 P, Q라고 하자. 또 그림과 같이 직선 아래 영역에 속하고 포물선 y=x2 위를 움직이는 두 점 R, S를 잡자. 사각형 PQRS의 넓이가 최대일 때, R과 S의 좌표를 구하시오.”

지난해 고려대 1학기 수시모집 수리논술에 나왔던 문제들이다. 인문계와 자연계 수리논술에 각각 네 문제씩이 출제됐다. 모두 ‘값을 구하라’거나 ‘식으로 나타내라’는 유형의 문제들이다. 고려대의 수리논술 문제를 살펴 본 입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똑 떨어지는 본고사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국어·논술 전문 학원인 일교시닷컴 학습과학연구소 박재원 소장은 “고려대의 수리논술은 논술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옛날 본고사형 주관식 문제와 거의 비슷하다”고 말했다.

서울대가 논술형 고사의 비중 확대를 뼈대로 하는 2008학년도 입시안을 발표하면서 ‘본고사 부활’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물론 서울대는 논술 강화가 본고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애써 해명했다. 하지만 많은 교육운동 단체들은 “서울대가 입시에서 갖는 영향력에 비춰볼 때, 본고사 부활 논의의 둑을 터 준 셈”이라며 우려했다. 이런 우려는 그동안 주요 대학들이 호시탐탐 ‘삼불정책’(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본고사 금지)을 무력화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데서 비롯된다.

사실 그동안 서울 지역 중·상위권 대학들이 교육부가 묵인하는 틈을 타 논술·구술 시험을 변형된 본고사 형태로 치러 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고려대 수리논술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대학들이 논술과 심층면접을 빙자해 영어·수학·과학 중심의 교과 지식을 묻는 문제들을 내 왔다. 이런 현상은 자연계가 조금 더 심하다. 성균관대는 지난해 수시 1학기 자연계 논술시험에서 열역학 등 과학 이론과 관련된 영어 지문 셋을 제시한 뒤, 냄새 분자 분자량의 비를 구하는 문제 등 수학과 과학을 연계한 본고사형 문제 여섯 개를 냈다.

자연계와 인문계를 불문하고 논술시험에 영어 지문이 등장하는 것은 것은 ‘약방의 감초’ 수준이다. 고려대는 지난해 수시 1학기 인문·자연계 공통 언어논술 시험에서 ‘조선시대 붕당정치’를 다룬 한글 지문 하나와 ‘집단간의 갈등’을 다룬 영어 지문 셋을 제시한 뒤, 네 지문을 각각 요약하는 문제를 냈다. 논술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영어 독해·번역 능력 시험에 가깝다. 서강대는 지난해 수시 1, 2학기 논술 시험에 영어 지문을 읽고 밑줄 친 부분을 직역하는 문제와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문제를 냈다. 성균관대도 지난해 수시 1학기에 영어 지문 둘을 요약하라는 논술 문제를 냈다.

심층면접이나 구술시험도 마찬가지다. 서울대는 자연계 수시·정시 심층면접 때 수식을 이용해 값을 구하거나 증명하는 수학·과학 문제를 내 왔다. 지난해 정시의 경우 “P가 n차 다항식일 때, 방정식 P(x)=0의 근의 개수는 n보다 클 수 없음을 증명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왔다. 한 논술·구술 전문 학원 관계자는 “지필고사 형태가 아니어서 교육부가 문제를 삼지 않을 뿐이지, 서울대의 심층면접은 본고사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대 물리학부 1학년 조아무개(19)군도 “심층면접이나 예전의 본고사나 제시된 문제를 푼다는 점은 동일하다”며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짧은 시간 안에 푼 뒤에 면접관들 앞에서 조리 있게 설명해야 해 어려웠다”고 말했다.

서울대뿐만이 아니다. 한양대는 2003년 수시 1학기 인문계 심층면접 시험에서 영어 지문을 주고, 빈칸에 들어갈 표현이나 밑줄 친 단어가 가리키는 내용을 묻는 문제 등 4지선다형 객관식 문제 다섯을 냈다. 자연계는 행렬의 개수를 구하거나(수학) 진자의 주기를 구하는 문제(물리) 등이 나왔다. 서강대의 2003년 수시 2학기 구술시험에는 영어 지문의 한 문단을 큰 소리로 읽는 문제와 밑줄 친 문장을 해석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정일학원의 신영 평가이사는 “주요 대학들의 본고사형 논술·구술 시험에 고교 교육과정을 훨씬 넘어서는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며 “논술·구술 시험이 사교육을 통해서 훈련된 학생들이나 특목고 학생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논술·구술이 창의력이나 종합적인 사고력 측정이라는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본고사로 변질한 상태에서 주요 대학들이 앞다퉈 대학별 고사를 강화하면 학교 교육 정상화는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서울 경복고 홍참범 교사는 “반복 훈련을 통해 어려운 문제를 기계적으로 잘 푸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는 학교가 학원과 경쟁할 수가 없다”며 “대학들이 논술·구술과 같은 대학별 고사의 비중을 높이면 사교육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학교 교육은 파행으로 치달을 게 뻔하다”고 말했다.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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