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양 성문고 토론 동아리 학생들과 이규철(둘쨋줄 맨 왼쪽) 교사가 지난 4일 오프라인 모임이 끝난 뒤 한자리에 모였다.
[교실 밖 교실] 안양 성문고 동아리 ‘시사연구반’
고2 겨울에 꾸려 온라인 중심 운영
사고력 키우고 글쓰기에도 보탬
“무모함 아닌 실력의 원천 될 것”
고2 겨울에 꾸려 온라인 중심 운영
사고력 키우고 글쓰기에도 보탬
“무모함 아닌 실력의 원천 될 것”
우리나라에서 ‘고3’의 존재 이유는 ‘수능 준비’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3이 되는 순간, ‘수능에 나오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은 대학 입학 뒤로 속절없이 유보된다. 독서니 토론이니 하는 ‘호사’는 언감생심이다.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정답을 골라내는 훈련만이 살 길인 양, 문제풀이를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 세월을 거꾸로 사는 고3들이 있다. 경기 안양 성문고 3학년 14명으로 이뤄진 독서·토론 동아리 ‘시사연구반’ 학생들이 주인공이다. 남들은 열심이던 동아리도 접는다는 고2 겨울방학 때, 이들은 새롭게 동아리를 꾸렸다. ‘입시 논술’에 대비하기 위한 것 아니겠냐고? 그런 이유만으로 모였다면 이 동아리는 벌써 ‘와해’ 위기를 맞았어야 했다. 1월 초,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얼마 뒤부터 수능 등급제가 폐지되면 서울지역 주요 사립대들이 정시 입학전형에서 자연계 논술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아리 회원 중 자연계 학생이 절반이나 되는 상황에서 모임이 유지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학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더욱이 그 뒤로 정시에서는 인문계 논술도 폐지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임은 계속 이뤄졌고, 지난 4일에는 책 한 권을 뗀 기념으로 조촐한 책걸이 파티도 열었다.
송현우군은 “자연계 논술이 폐지된다는 뉴스를 듣고 엄청 갈등을 했지만, 이런 활동을 하면서 사고력을 기르는 것도 우리가 공부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이를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지수양은 “시간을 너무 빼앗기는 게 아닌가 걱정도 했지만, 사실 동아리 활동 안 한다고 그 시간에 꼭 공부를 더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이들은 지난 겨울방학 동안 <생각나무, 논술열매>라는 책을 함께 읽고 토론했다. 외모, 자살, 상업적 소비문화, 기부 등 24개 주제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글들을 담고 있는 청소년 교양서다. 토론은 한 주에 3개의 주제에 해당하는 글을 읽은 뒤, 인터넷 카페에 세 가지 주제를 각각 400자로 요약한 글과 각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400자로 정리한 비평 글을 올리면 다른 회원들이 서로 댓글을 달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댓글을 통해 서로의 관점을 비교해 보기도 하고, 친구의 요약·비평 글을 첨삭 지도해 주기도 한다. 카페에 시사 문제에 대한 자료를 올려 함께 나누고 댓글로 토론도 벌인다. 카페의 ‘열려라 토론의 장’ 게시판에는 서브 프라임 사태, 대운하, 두발 자유화, 성형수술 등에 대한 자료가 올려져 있다. 조재상군은 “친구들이 달아 준 댓글을 통해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발전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평가했다. 박지수양은 “친구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 주면서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글쓰기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며 “동아리 활동을 하다 보니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학기 중에도 한 달에 한두 권꼴로 책을 읽고 토론을 하기로 했다. 3월에는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미국 소설 <앵무새 죽이기>를, 4월에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를 읽기로 했다. 짬짬이 오프라인 시사토론도 할 예정이다. 첫 번째 주제는 영어 공용화로 정했다.
“흔히들 말합니다. 고3이면 책 읽을 시간에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라고요. 또 수능 대비 문제집이나 풀라고요.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싶습니다. 책 읽고 토론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겁니다.” 동아리 회장인 유경민군은 “사교육의 메카라는 대치동 논술학원에 잠깐 다닌 적이 있는데 마치 논술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일정한 틀을 주입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며 “공교육 테두리 안에서도 논술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동아리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독서와 토론이 수능 언어영역이나 탐구영역 실력 향상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동아리 지도를 맡고 있는 이규철 교사는 “고3 때 책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을 한다는 것이 어쩌면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기본이 되고 실력의 원천이 된다”며 “이런 활동을 통해 쌓인 독해력과 사고력, 배경 지식은 논술과 면접, 수능에 두루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
동아리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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