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해돋이 인상’
① 예술은 왜 필요한가 / 관련 논제 해결하기 -난이도 수준- 고등
<논제> 각 제시문에 나타난 예술과 과학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오늘날 과학 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예술 창작 과정을 예로 든 후, 미래 예술과 과학의 상호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시오.(1,000±100자)
(가-1) 내 그림은 이젤에서 나오지 않는다. 캔버스를 두루마리째 펼쳐놓기가 무섭게 칠해 나간다. 캔버스를 딱딱한 벽이나 마룻바닥에 압침으로 박아 놓고 그리는 수가 있는데, 그 때 딱딱한 표면의 저항을 느낀다. 나에게는 마룻바닥에 펼친 화폭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펼쳐진 화폭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화폭의 가장자리부터 칠하기(흘리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글자 그대로 그림의 한가운데 갇히게 된다. 이것은 서부 인디언이 모래바닥 위에 그림 그리던 것과 같은 모습이다. 나는 보통 화가들이 쓰는 이젤, 팰릿, 붓 따위의 도구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막대기, 흙손, 칼, 페인트, 모래 알갱이가 있는 두꺼운 안료, 깨진 유리조각, 그 밖의 낯선 재료들을 좋아한다. 한참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일이 끝나고서야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의식할 뿐이다.
나는 새로운 변화를 이루거나, 이미지를 깨뜨리거나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감으로 칠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그 페인팅의 생명이 되살아나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과의 접촉을 잃는다면 그 결과는 나에게는 혼란이다. 그림과의 접촉-거기에는 순수한 조화와 순조로운 ‘주고 받음(give and take)'과 막힘 없이 흘러나오는 그림이 있다. -잭슨 폴록
(가-2) 리차드 테일러는 먼저 컴퓨터로 스캔한 폴록의 그림을 유심히 관찰했다. 폴록의 그림에는 두 가지 요소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폴록이 자신의 몸으로 물감통을 치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물감이 통에서 흘러내리는 운동이었다. 이 두 가지 운동은 서로 다른 스케일로 그림의 궤적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몸이 만들어내는 궤적은 움직임이 컸기 때문에 5㎝와 2. 사이에서 긴 궤적들을 만들어 내는 반면 물감이 떨어지는 운동은 1㎜와 5㎝ 사이 궤적들을 만들어냈다. 테일러는 이 두 스케일을 구분해서 그림의 차원을 계산해 보았다. ‘박스 카운팅(box-counting)'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계산된 폴록의 그림들은 작은 스케일에서는 1.1~1.3의 차원을 만들어내는 한편, 큰 스케일에서는 2와 3 사이의 차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통해 폴록이 처음에 굵은 궤적으로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린 후, 수많은 자기 유사구조의 궤적을 통해 그림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다듬어 갔다고 주장했다. 폴록의 그림들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자기 유사성을 직감적으로 이해한 폴록의 세밀한 계획 하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그림 안에는 물감의 점성과 흔들리는 물감통의 속도, 물감을 떨어뜨리는 각도와 높이 등이 만들어 낸 정교한 자연의 패턴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중략)
대중매체에 소개된 그의 작업 방식이나 평론가들이 설명하는 대로, 그가 정말 자신의 몸짓과 물감통의 반복 운동이 만들어낸 궤적들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캔버스 위에 드러내려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캔버스의 한계를 넘어, 그리는 ‘과정’ 혹은 그린다는 ‘행위’를 중시하는 퍼포먼스의 길을 제시하였다는 평론가들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폴록은 지시성이나 방향성을 갖는 형상을 거부하고 우연성이 빚어내 패턴에 주목했지만, 그의 3차원 몸놀림이 만들어낸 2차원 궤적에는 자연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카오스와 프랙탈이 지문처럼 찍혀 있었다. -정재승 <과학콘서트> (나) 빛을 그리려 했기 때문에 인상파는 프리즘(prism)으로 분광된 7가지 색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인상파는 7가지 색으로, 순간적으로 포착된 빛의 상태를 재빨리 그렸다. 인상파가 빛에 집착한 이유는 인상파에게 진실은 물체 그 자체가 아니라 물체가 반사해내는 빛이었기 때문이다.(클로드 모네 ‘해돋이 인상 ’ 참조) 그들은 빛의 변화가 색채의 변화, 나아가 형태까지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상파는 빛이 변화의 주체이고 형태는 빛의 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종속변수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미술은 물체=독립변수, 빛=종속변수라고 생각했었는데, 인상파는 이러한 생각을 180도로 뒤집어버린 것이다. 인상파에게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빛이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빛을 분광해서 보았다. 광학(optics)의 수혜를 입었던 것이다. 이런 분광(分光)에 대한 지식과 입자, 파동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인상파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신인상파의 대가 쇠라도 빛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모네와는 다르게 빛을 그렸다. 모네는 빛을 파동으로 본 반면, 쇠라는 빛을 연속적으로 방사되는 입자로 보고 색점으로 빛 입자를 그렸다. 그의 그림은 빛 입자들을 색점을 찍듯이 그렸다 하여 점묘주의(pointilism, Divisionism)라고 부른다. 쇠라는 아무런 사심 없이 빛 입자만을 관찰하는 과학자 같이 작업했다. 그는 빛이 물체에 부딪혀서 반사되는 빛 입자의 운동과 변화를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의 그림에는 뜨거운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박우찬 <미술은 이렇게 세상을 본다> 중 발췌
(다) 화가들은 형벌의 잔인성을 그리는 한편 점점 해부학적 지식을 터득해서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렘브란트(Harmensooz van Rijn Rembrandt, 1606~1669)는 네덜란드 화가로 처음에는 초상화를 그렸다. 또 성서의 여러 정경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인간의 영혼을 부드럽고 훌륭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장의 해부학 강의 장면도 그렸는데 그것은 바로크 시대에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해부학적 지식을 지녀야 했음을 시사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화가는 손수 열 구 이상의 시체를 직접 해부했다고 하는데,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개화된 이탈리아인들조차도 그가 ‘마법사’가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보면 시체의 발 아래쪽에 커다란 책이 펼쳐져 있다. 당시 유명했던 해부학의 대가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의 ‘해부학 교본’이다. -문국진 <명화와 의학의 만남>
(라) 무용과 컴퓨터 기술의 결합을 꾀한 최초의 시도는 1960년대에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장 베만이 안무 디자인을 위해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시작됐다. 70년대에 와서는 몇몇 연주자들이 라바노테이션(무용보)을 전산화하는 기술을 고안해 냈고, 이어서 기록들의 편집과 분석, 그리고 복잡한 조작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나아가 전산화된 무용보 체계는 그래픽스 요소와 전자 음향 합성 장치도 기억 장치에 집어넣음으로써, 기록된 무용이 컴퓨터의 모니터에 나타나게 할 뿐 아니라 컴퓨터로 음악을 반주할 수도 있게 되었다.
70년대의 또 다른 발전은 무용을 위해 전산화된 신체 모형을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막대기 형태의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스모리아의 <소시지맨(Sausageman)>(1978)과 엠메트의 <버블맨 (Bubbleman)>(1978)으로 발전해 왔고, 곧이어 트와일라타프의 1983년 비디오 안무 <캐서린 휠>에서는 빛의 장대로 이루어진, 전산화된 무용수가 등장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음악 비디오에서 전산화된 무용수가 등장하곤 한다. 또한 70년대에는 컴퓨터와 필름을 사용해 인간 동작을 분석하고 모니터하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력은 무용 기능학과 고니오미트릭스 (gonomettics, 각도측정학)에 주로 사용되었고, 80년대에는 더욱 정교해졌다. 특히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무용 교육자들 사이에 전산화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이에 따라 컴퓨터를 사용한 무용 지도법의 개발이 시도되기도 했다. 80년대 초의 다른 여러 가지 혁신으로는 컴퓨터화된 그래픽 무용보 체계인 돔 시스템(1984)의 개발, 무용 이미지의 전산화, 그밖에 무용에 관련된 소프트웨어의 개발 등이 있다. -김말복 <미래의 무용> 중 발췌
잭슨 폴록의 작업 모습
대중매체에 소개된 그의 작업 방식이나 평론가들이 설명하는 대로, 그가 정말 자신의 몸짓과 물감통의 반복 운동이 만들어낸 궤적들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캔버스 위에 드러내려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캔버스의 한계를 넘어, 그리는 ‘과정’ 혹은 그린다는 ‘행위’를 중시하는 퍼포먼스의 길을 제시하였다는 평론가들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폴록은 지시성이나 방향성을 갖는 형상을 거부하고 우연성이 빚어내 패턴에 주목했지만, 그의 3차원 몸놀림이 만들어낸 2차원 궤적에는 자연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카오스와 프랙탈이 지문처럼 찍혀 있었다. -정재승 <과학콘서트> (나) 빛을 그리려 했기 때문에 인상파는 프리즘(prism)으로 분광된 7가지 색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인상파는 7가지 색으로, 순간적으로 포착된 빛의 상태를 재빨리 그렸다. 인상파가 빛에 집착한 이유는 인상파에게 진실은 물체 그 자체가 아니라 물체가 반사해내는 빛이었기 때문이다.(클로드 모네 ‘해돋이 인상 ’ 참조) 그들은 빛의 변화가 색채의 변화, 나아가 형태까지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상파는 빛이 변화의 주체이고 형태는 빛의 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종속변수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미술은 물체=독립변수, 빛=종속변수라고 생각했었는데, 인상파는 이러한 생각을 180도로 뒤집어버린 것이다. 인상파에게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빛이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빛을 분광해서 보았다. 광학(optics)의 수혜를 입었던 것이다. 이런 분광(分光)에 대한 지식과 입자, 파동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인상파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신인상파의 대가 쇠라도 빛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모네와는 다르게 빛을 그렸다. 모네는 빛을 파동으로 본 반면, 쇠라는 빛을 연속적으로 방사되는 입자로 보고 색점으로 빛 입자를 그렸다. 그의 그림은 빛 입자들을 색점을 찍듯이 그렸다 하여 점묘주의(pointilism, Divisionism)라고 부른다. 쇠라는 아무런 사심 없이 빛 입자만을 관찰하는 과학자 같이 작업했다. 그는 빛이 물체에 부딪혀서 반사되는 빛 입자의 운동과 변화를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의 그림에는 뜨거운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박우찬 <미술은 이렇게 세상을 본다> 중 발췌
렘브란트(1606~1669),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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