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갑흠(43)씨네 가족이 11일 거실에서 도미노 놀이를 하고 있다. 지난해 3월 텔레비전을 없애면서 백씨네 집 거실은 온 가족의 독서실 겸 놀이공간으로 바뀌었다.
텔레비전 없앤 백갑흠·이미자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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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속 이야기일뿐이라고?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에서 ‘크록텔레 가족’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회사원 백갑흠(43·인천 부평구)씨도 마찬가지다. 백씨는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끼고 사는 ‘소파족’이었다. 퇴근하면 소파에 누워 리모콘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시간을 보냈다. 하도 많은 시간을 누워있다보니 소파의 머리가 닿는 부분이 헤질 정도였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현재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 승혁(11)이도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텔레비전부터 켰다. 밤 늦게까지 아빠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일도 잦았다. 늦둥이 딸 윤서(4)도 광고와 만화만 나오면 엄마, 아빠가 불러도 못 들을 정도로 텔레비전에 빠져들었다. 백씨는 “아내를 빼고는 나와 두 아이 모두 거의 중독 수준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백씨가 텔레비전을 ‘끊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해 3월. 승혁이에게 눈을 계속 깜빡거리는 ‘틱 장애’ 증상이 나타났다, 백씨는 ‘틱 장애’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인터넷을 뒤지다 우연히 <내 아이를 지키려면 TV를 꺼라>라는 책을 접하게 됐다. “텔레비전의 폐해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더군요.” 충격을 받은 백씨는 결혼 뒤 처음으로 가족회의까지 열어 텔레비전을 치우기로 결정했다.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는 해인지라 미련이 남아 없애지는 못 하고 일단 뒷베란다로 옮겼다. 그러다 2주 뒤 마음을 굳게 먹고 지인에게 텔레비전을 줘버렸다. 집안에 텔레비전이 있는 한, 언젠가는 다시 보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눈으로 씹는 껌’으로 비유될 정도로 중독성이 강한 텔레비전을 마침내 집에서 추방한 것이다. TV 없으니 대화·책읽기 절로 “텔레비전 없이 무슨 재미로 사나 하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금단 현상’이 적더군요. 처음에는 윷놀이 등 텔레비전을 대신해 할 거리들을 일부로 찾아야 했는데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할 일이 생기더라고요.” 백씨는 “가족간의 대화처럼 꼭 했어야 될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었음에도 그동안 텔레비전 때문에 못했던 일들을 하느라 심심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 승혁이는 더 빨리 적응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심심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곧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승혁이는 “처음 2주 동안을 빼고는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텔레비전을 없애면서 백씨 가족에게 찾아온 변화는 “거의 혁명에 버금갈 정도”였다. 큰 아이와 노는 시간이 많아지고 대화를 많이 나누다보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원하는 게 뭔지,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등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됐다. 백씨는 “텔레비전을 없애기 전에는 아들이 나에게 학교나 친구 얘기를 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가족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육아, 자녀와의 대화법, 청소년의 심리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일부러 관련 서적을 찾아 읽기도 했다. 둘째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아빠가 손수 그림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이 놓여 있던 거실에는 책꽂이가 들어섰다. 설거지와 청소 등 집안일은 그때그때 아내와 함께 한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 이미자(38)씨는 “남편이 가사를 분담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으면서도 텔레비전에 시간을 빼앗겨 실천을 못했는데 지금은 육아뿐만 아니라 가사에도 열심히 참여한다”고 자랑했다. 엄마·아빠가 달라지는게 우선 “텔레비전을 끄면 가족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더군요.” 백씨는 “텔레비전 중독이든, 컴퓨터 중독이든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엄마, 아빠”라며 “좀더 많은 가족들이 우리와 같은 행복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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