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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그 현묘한 ‘대결’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록 2007-04-01 17:10

<형사 듀얼리스트>는 상대를 노리는 혼신의 대결이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립과 합일이 변증법의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현란한 변증법의 향연이라 할 만 하다. <한겨레> 자료사진
<형사 듀얼리스트>는 상대를 노리는 혼신의 대결이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립과 합일이 변증법의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현란한 변증법의 향연이라 할 만 하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 교수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이명세의 ‘형사 듀얼리스트(Duelist)’

이명세 감독은 “영화는 드라마가 아니라, 시(詩)다”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플롯이 아니라 종합예술로서 영화의 특징, 즉 이미지와 음향이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작품의 예술적 효과인 것 같다. <형사 듀얼리스트>는 이런 작가의 예술관을 염두에 두고 감상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드라마 아닌 시’ 원칙

대결은 양자 대립과 합일 의미


정-반-합 원리로 사랑을 낳다

그렇다고 영화에 아예 이야기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영화에도 물론 스토리가 있다. 조정의 어지러움을 틈타 가짜 돈이 유통된다. 좌포청의 노련한 안 포교와 그의 후배이자 무술 제자인 남순은 짝을 이뤄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위폐의 출처를 쫓는다. 특히 남순은 물불 안 가리며 임무를 수행하는 열혈 형사다. 그녀는 범인을 잡기 위한 필사의 노력으로 용의자 병조판서의 오른팔이자 신출귀몰한 검객 ‘슬픈눈’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 추적 과정에서 수많은 ‘대결’이 펼쳐진다.

영화 제목에 한글과 나란히 표기돼 있는 ‘Duelist’라는 영어는 ‘대결자’라는 뜻이다. 영어에서 ‘듀얼(duel)’이란 말은 이탈리아어로 양자 대결 또는 결투를 뜻하는 ‘두엘로(duello)’에서 유래하고, 이 말은 라틴어로 ‘둘’을 뜻하는 ‘두오(duo)’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을 알아두면 (곧 설명하겠지만) 이 영화가 현란한 변증법(dialectic)의 향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든 지루하게 본 사람이든 모두 ‘돌담길’에서 남순과 슬픈눈이 대결하는 장면의 그 독특한 이미지와 음향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장면뿐만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각양각색의 대결들로 점철돼 있다. 대결의 이미지와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연속, 그것이 오히려 이 작품의 이야기 구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대결들이 우리에게 철학적 화두를 던진다. 대결은 양자 대립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양자 합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대결 장면 가운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돌담길에서의 결투다. 쫓는 자 남순과 쫓기는 자 슬픈눈은 마침내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안개 옅게 서린 돌담길에서 대결한다. 남순의 쌍비단도와 슬픈눈의 장검은 현란하게 부딪치며 길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긴박하게 진행한다. 검을 놀리는 사람의 몸과 손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단검과 장검의 선명한 은백색 섬광은 대결의 치열함을 그대로 노출한다. 그렇다면 챙챙 쇳소리를 내며 격렬히 부딪치는 칼들은 양자 대립의 극치만을 드러내는가?

그렇지 않다. 칼들은 서로 부딪치며 뒤엉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칼들이 뿜어내는 섬광의 꼬리 선이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서로를 품어 안 듯 엉키는 이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격렬한 대결은 또한 합일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 칼들이 합일하고 있으니, 검객들이야 오죽하랴. 남순과 슬픈눈은 격렬하게 대결하면 할수록, 그들의 싸움이 신비한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거역할 수 없다. 물론 모든 것이 섞여 들어가는 그런 혼돈의 합일 속에서 누군가의 검이 상대방에게 먼저 치명적 일격을 가할 수 있다. 명백히 분리된 대립의 상황이 아니라, 바로 합일의 혼돈 속에서 누군가 죽을 수 있는 것이 목숨을 건 대결이다.

돌담길 대결에서 거역할 수 없는 합일을 본다면, 혹자는 남순과 슬픈눈이 젊은 남녀이고, 영화 속 이야기꾼이 말하듯 “달밤에 뭔 정분난 머시매 가시내가 엉겨 붙은 것맹키로” 남몰래 싹트는 그들의 사랑을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했기 때문에 대결하면서 합일의 경지에 이른 게 아니다. 그와 반대로, “아, 첨에는 그냥 날이 시푸렇게 선 칼을 휘둘러 쌈시롱 남녀가 겁나게 싸우드랑께”라고 이야기꾼이 묘사하듯이, 서로 상대를 노리는 혼신의 대결이 합일의 경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사랑이 싹틀 수 있었던 것이다.

남녀 사이의 정분을 떠나서, 대결이 곧 합일이라는 것은 영화의 여러 이미지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안 포교와 병조판서 송 대감의 마지막 대결은 이를 매우 간명하면서도 진하게 보여준다. 위폐 유포의 주범으로 벼랑 끝에 몰린 송 대감은 안 포교와 최후의 대결을 한다. 이 장면의 모든 이미지는 대립을 상징한다. 안 포교의 검은 포교복과 송 대감의 하얀 비단옷이 대립하며, 그 구도 안에서 마당을 둘러싼 검은 빛 포졸들과 창백한 이미지의 송 대감은 다시 한번 대비되고, 안 포교의 어두운 이미지는 배경의 붉은 빛 천과 독특하게 대조된다. 이 모든 것이 대립의 긴장을 극대화시키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치명적인 일격을 날린다. 순간 둘은 회전하며 하나로 합쳐지고, 단 일합의 공방으로 대결은 끝난다.

이 영화에는 사람 사이의 대결만 있는 게 아니다. 색과 빛의 대결, 상황의 대결, 경향의 대결도 있다. 적과 흑, 빛과 어둠, 긴장과 난장(亂場), 적막과 소란, 기존과 전위, 엄숙과 해학이 대결한다. 그리고 이 모든 대결에서 대립이 있는 만큼 합일의 현묘(玄妙)한 의미가 부각한다. 특히 거의 모든 이미지에서 검은 색은 분리와 대립의 원인이자 합일의 구심점이다. 곧 검정이 개입함으로써 다른 색이 흩어져 대립은 시작되고, 묘하게도 그 대립의 상황에서 검정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여 자기를 중심으로 합일을 유도한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김용석/영산대 교수
대립과 합일은 변증법의 핵심 요소다. 서구 사상에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헤라클레이토스는 ‘폴레모스’를 만물의 보편 법칙으로 파악했다. 그리스어로 폴레모스는 투쟁, 전쟁, 논쟁 등 모든 종류의 싸움과 다툼을 뜻한다. 대결도 이에 포함된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도 폴레모스는 대립과 합일이 번갈아 일어나는 과정이다. 바로 그런 과정이 생명력과 삶의 활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결자들의 싸움에서 무엇을 보는가? 무엇보다도 생명의 기운을 본다. 서로 적이라 할지라도 대립과 합일의 진지한 대결은 생명의 기운을 끌어올려 사랑을 낳게 한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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