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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초등학생, 작가에 편지를 쓰다

등록 2005-03-20 20:00수정 2005-03-20 20:00


헨쇼 선생님께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 가치를 긍정하게 만드는 책들이 아주 가끔 있다. 〈헨쇼 선생님께〉는 미국이 아니었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소설이다. 이동식 컨테이너에 사는 사람들, 대륙을 횡단하며 트럭을 모는 아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엄마, 아이를 두고 이혼한 부부 등은 온통 ‘미국적’인 소재와 설정이다.

그러나 주인공 소년 리 보츠는 전혀 미국적이지 않다. 세계 어디서나 마주칠 법한 아이다. 그는 지금 따분하기 짝이 없는 가난한 동네에서 지루함에 몸을 비비틀고 있다. 특별히 총명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바보 멍청이도 아니다. 리 보츠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저 ‘평균치의 소년’이다.

세상의 모든 놀라운 일이 언제나 그러하듯, 변화는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학교 선생님이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작가에게 편지를 쓰는 숙제도 내준다. 리 보츠는 작가의 책이 “아주 재밌었다”며 편지를 쓴다. 딱 세 문장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쓴 이 편지는 이후 6학년 때까지 계속된다. 글은 길어지고 표현도 성숙해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에게 보내는’ 일기도 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숙제라서 시작했는데
6학년 때까지 이어져
소년기의 진한 상처가
감동으로 차오른다


소년은 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만나기 힘든 아빠에 대한 그리움, 이혼한 엄마에 대한 애증, 도시락을 훔쳐가는 정체불명의 도둑, 그리고 그다지 중대한 이유도 없이 작가가 되겠다고 문득 결심한 자신의 소망 등을 말한다. 그 흔한 ‘지은이의 말’이나 ‘옮긴이의 말’도 없이, 〈헨쇼 선생님께〉는 다짜고짜 편지로 시작해 일기로 끝난다. 약간의 당혹스러움도 잠시의 일이고, 소년의 이야기를 ‘훔쳐보느라’ 이 책을 놓을 수 없다.

마법 같은 힘은 글에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의 글이 어느새 6학년의 글이 돼 있다. 앳된 아이가 어느새 조숙한 청소년이 돼 있다. 입가의 웃음은 어느새 마음 깊은 곳 쓸쓸함으로 변해 있다.

이 모든 변화를, 책 읽는 동안엔 눈치챌 수 없다. 잘 짜인 문학의 힘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가랑비에 젖듯 한방울씩 떨어지던 감동이 울컥 가슴에 차오른다. 연필을 꾹꾹 눌러쓰며 소년기의 상처를 적어내려가는 세상 모든 곳의 소년이 몰려온다. 그 가운데 하나를 책으로 만났으니 반갑고 또한 고마울 따름이다.

원래 이 책은 1994년 〈편지 쓰는 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 이번에는 정식 판권계약을 맺어 다시 출판했다. 지은이의 ‘오묘하고도 미묘한 글맛’을 살리기 위해 번역에 특별히 정성을 기울였다. 한국 작가가 연필과 흑연으로 그린 삽화는 가난하고 숫기없는 소년의 쓸쓸한 심상을 잘 살려 냈다. 고학년, 비벌리 클리어리 글, 선우미정 옮김, 이승민 그림. -보림/8000원.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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