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한 권의 책 / 살아있는 모든 것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시간이 참으로 덧없이 스러진다. 차가운 비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길바닥에 나뒹굴며 사람들 발길에 짓밟히는 그 소멸의 모습이 애처롭다. 무엇인가의 끝을 직면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스산하고 쓸쓸하다. 하지만 한 해는 다시 시작되고, 봄이 되면 나무는 파릇한 싹을 틔우지 않겠는가. 스러지는 모든 것들은 새롭게 살아나는 것들로 인해 다시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소멸이 없으면 재생도 없고, 절망을 모르면 희망도 낯설고, 슬픔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지 않으면 기쁨의 빛을 맞을 수 없다는 삶의 이치가 되새겨지는 때다.
동물들과 낡고 초라한 인생들 서로를 보듬으며 세상에 선다
신시아 라일런트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문학과지성사)은 그런 삶의 이치를 눈물겹게 들려주는 책이다. <그리운 매이 아줌마>나 <조각난 하얀 십자가> 같은 책에서 영혼의 구도자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반 고흐 카페>에서는 사소한 일상을 무심한 듯 툭 건드려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바꾸어내는 마법사적 솜씨를 보여준 이 작가는, 여기에서는 쓸쓸한 끝과 빛나는 시작을 솜씨 좋게 이어붙여 절묘한 조각이불을 만들어낸다. 모든 춥고 외로운 인생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이불을.
낡고 초라하고 너덜너덜한 인생, 남들에게 잊혀지고 혹은 스스로도 포기한 인생들이 어떻게 온기와 힘을 되찾아 힘차게 다시 서는지를 보여주는 열두 편의 이야기들은 아주 다채롭다. ‘스스로 아무것도 잘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행복하지 않은 아이, 앞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야 하는 노인,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고 여기는 알콜중독 참전 용사, 졸지에 부모를 잃고 무뚝뚝한 이모와 함께 살아야 하는 소년. 인간만이 아니다. 버림받은 채 추위와 굶주림으로 떠는 강아지, 늙고 눈먼 금붕어, 꼬리 잘린 떠돌이 새끼 고양이. 모두들 시원찮고 하찮아 보이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하찮아 보이는 존재들이 모두 살아 있는 것들이고,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존엄하다는 신념을 정갈하고, 힘차고, 따뜻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그 존엄성에 가슴 벅찬 아름다움을 보태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방식이다. 다람쥐와 알콜중독자, 특수반 아이와 거북, 가출을 꿈꾸는 소년과 보금자리를 꿈꾸는 새끼 길고양이. 이들이 우정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따뜻하게 채워가고 의미있게 변화시키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그 변화의 기운은 너무나 그윽하면서 충만해 책 밖의 독자까지도 충분히 휘감아 부풀린다. 책 말미의 구절, ‘그 게는 이제 너무 작아진 옛 껍질을 벗고,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가 의미심장하게 뛰어들 정도로, 나는 뭔지 부쩍 자란 듯한, 그래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온 듯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동화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적당할 듯한 정형화된 이야기만 하지 않는 이 작가는 감탄스럽다. 나를 배반하는 힘겨운 인생에 대해 거리낌없이 털어놓고, 그럼에도 생명 있는 존재는 존엄하며 살아가는 일은 아름답다는 전언을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치는 그의 글은, 아이들을 존중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한 본보기다.
김서정/동화작가, 중앙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sjchla@hanmail.net
김서정/동화작가, 중앙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sjchl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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