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조선족 소학교 백일장’ 지상중계
매년 5월,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정에서는 ‘동북3성 조선족 소학교 백일장’이 열립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안에 있는 61개 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한글’ 글짓기 대회입니다. 나라 밖에서 우리말을 익히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우리글로 생각과 느낌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어린 학생들의 솜씨가 놀랍습니다. 글 속에는 조선족 어린이들의 ‘오늘’이 담겨 있습니다. 돈 벌이 때문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높은 교육열, 차별과 동화정책에도 아랑곳없이 조선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도 보입니다. 올해로 8년째를 맞는 이 대회 수상작들 중에서 몇 편을 골라 소개합니다.
“조국 말·글 쓰는 한 우리는 조선족이죠”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 있는 공원소학교는 조선족 소학교 백일장에서 매년 좋은 성적을 거뒀다. 올해 8회째인 이 대회에서 대상 수상자만 5명을 배출했으니, ‘글짓기 명문’으로 꼽힐만 하다. 올해 대회에 참여한 학생은 전교생 1천3백명 가운데 350여명. 고급학년조(5·6학년)와 중급학년조(3·4학년) 대상 수상자가 모두 공원소학교에서 나왔다.
작문을 가르치는 김영화 교사(50)는 정규 작문 수업 시간 외에도 한 학년에 50명씩 ‘작문 동아리’를 꾸려 일주일에 두 번 작문 수업을 하고 있다. 더 큰 도시로 나가 명문 대학에 진학하길 꿈꾸는 아이들에게, 수학, 과학 동아리 대신 중국 대학 입시 과목이 아닌 ‘조선어 작문’을 강조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이 근처 영어, 수학 학원으로 갑니다. 은퇴한 선생님이나 대학 졸업생들이 운영하는 학원이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중국에서 살면서 조선말, 조선글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대도시 대학에 다니고, 좋은 직장을 얻고, 사회에서 어울려 살아가려면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더 잘 알아야 하니까요.”
자치주 안 조선족 학교 수가 해마다 1개꼴로 줄어드는 현실도 안타깝다. “아이들 글을 보면, 버스를 타고 멀리서 학교에 오는게 힘들다는 얘기가 자주 나와요. 시골 학교들이 문을 닫으니 아이들이 시내 학교로 전학을 오는데, 통학 거리가 멀어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고 몸도 고되죠. 어쩔 수 없이 한족 학교로 옮기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
얼마전 공원소학교 앞에 작은 한국책 독서사(도서관)이 생겼다. 한국에서 온 한 기업인이 아이들을 위해 사재를 턴 것인데, 아이들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한글 그림책, 동화책을 읽고 또 읽는다. “중국책을 조선어로 번역한 책을 주로 접하니까, ‘진짜’ 한글책을 볼 수 있다는 게 아이들에게는 기쁜 일이지요. 덕분에 ‘녀자’를 ‘여자’라고 쓰는 아이들이 많아졌지만, 굳이 고치지 않고 둘 다 쓰도록 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 접하는 한국문화, 한국에서 일하는 부모님과 친척들로 부터 듣는 한국 현실이 아이들이 알고 있는 한국의 전부지만, 그래도 한국말과 글을 열심히 배우고 책을 읽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고맙고 기특하단다. “중국에 살고 있지만, 조국을 잊지 않고 조국의 말과 글을 쓰는 한 우리는 지구상에서 ‘조선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작문 교사의 사명이고요. ”김 교사는 조선족 학교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한글책과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는 다양한 교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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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파요>
박서경/도문시 조선족실험소학교 2학년
나의 어머니는 매일 12시간씩 슈퍼마케트에서 일을 하면서도 나의 공부만은 등한시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어쩌다 시름 놓고 한참 노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따르릉!”
어머니였습니다. 나더러 조선어문복습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숙제를 다 했는데. 공부는 무슨 공부…)
나는 할 수 없이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조선어문복습을 끝마치고 텔레비죤을 찰칵 켰는데 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따르릉!”
다른 때에는 반가운 어머니의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귀찮은 어머니의 목소리입니다.
어머니는 또 나에게 한어받아쓰기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항상 반가운 어머니의 목소리였으면 좋다고 생각하며 겨우 한어받아쓰기를 끝마쳤습니다.
언제면 시름놓고 놀 일요일이 되겠는지 참 기다려집니다.
오늘은 참으로 놀고 싶습니다.
“따르릉!”
(제8회 저급학년조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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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할머니와 코신>
김춘연/연길시 공원소학교 6학년
한번 또 한번 마당에 들어설 때면 할머니의 흔적이 보여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유일하게 남기신 흔적-코신입니다. 시가지로 이사온 뒤로 코신을 못신어 못내 아쉬워하시던 할머니…. 정말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시내가로 나가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살아온 나입니다. 그때 할머니는 아침마다 일찍 빨래감과 빨래방망이가 든 대야를 이고 어린 나를 앞세워 개울물이 돌돌 흐르는 시내가로 나가시군 하셨습니다. 아침엔 공기가 좋고 물에 이끼가 안떠 맑다나요? 언제나 꼭 같은 하얀 코신에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하얀 저고리고름을 휘날리시며….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긴 싫어도 물장구치며 노는게 좋았습니다. 할머니는 바위만큼 큰 돌을 찾아 그곳에서 빨래방망이로 빨래를 톡톡 두드리고 개구쟁이였던 나도 할머니를 따라 작은 돌우에 손수건을 올려놓고 깨끗하게 씻는다고 시늉을 냈지만 이내 싫증내군 했습니다. 뒤미처 아예 물속에 첨벙 뛰여들어 그 수건으로 미꾸라지를 잡는다며 야단법석이였습니다. 늘 한마리도 잡지 못하는 나를 항상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바라보시던 할머니, 빨래를 끝낸 할머니는 코신을 벗어놓고 물속에서 돌을 하나 찾아들고 그걸로 빡빡 비비군 하셨습니다. 참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비누도 아닌 돌인데 코신이 그렇게 하얗게 될수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나는 또 앞장서 폴짝거리고 할머니도 신이 나시는지 흥겨운 우리 가락을 넘기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마을의 아침은 할머니의 노래소리로 열리군 했답니다. 시집 오던 첫날에도 코신을 신고 오셨다는 할머니, 잘잘 코신을 끌면서 고추를 말리고 쿵쿵 절구방아 찧으시던 할머니….
가슴이 아파옵니다. 할머니가 내곁에 없다는 현실 때문에…. 그리고 그립습니다, 코신을 신고 살아오시던 할머니와 그 하얀 코신…. (제8회 고급학년조 대상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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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황성혜/연길시 공원소학교 4학년
하늘나라
해님가족
아주아주
화목하죠
해님아빠
달님엄마
별님아이
함께 모였죠
벙긋벙긋
방긋방긋
방실방실
가족사진 찍었죠
우리 가족
이게 뭔가?
한국으로 훌쩍
일본으로 훌쩍
아빠
엄마
나
산산히 흩어져
헉헉
흑흑
엉엉
서로서로 그리죠
야,
참말 부러워요
언제면 한번
가족사진 찍어볼가요?
(제8회 중급학년조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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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곳>
황새별/연길시 건공소학교 6학년
다른 애들한테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아마 북경이요, 미국이요 심지어는 로케트를 타고 달나라에 가보고 싶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어머니의 일터에 가보고 싶다.
어머니의 일터는 큰 회사도 좋은 직장도 아닌 나무울바자를 세운 외딴 시골집이다. 이 헐망한 시골집에서 어머니는 밤낮없이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며 명태를 밸 따고 말리우고 방치로 두드려 가공한다.
한때는 이런 어머니가 싫은 적도 있었다. 선생님이 어머니의 직장을 조사할 때면 뭐라 대답할수 없었고 또 애들이 “명태 비린내 난다”, “명태 찌든 냄새 난다”하면서 코를 싸쥐고 수군거릴텐데 그런 말까지 냈다간 ‘왕따’당할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치와 감자채 그리고 시래기국만 오르는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원망스럽고 영어사전도 없어 항상 친구들의 것을 빌려보고 책상이 없어 늘 자그마한 밥상에 마주앉아 공부하던 일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된 감기에 걸렸다. 온밤 줄기침을 깇다나니 별로 쉬지도 못했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지어놓고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하러 나가셨다. 마침 일요일이라 늦게 일어나 밥상에 마주앉은 내 눈에는 밥상우의 알약들이 보였다. 어머니가 드시려고 내놓았다가 잊고 잡숫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다. (온밤 기침으로 쉬지도 못하시더니 약마저 잡숫지 못하고 일을 나가시다니!) 평소에 어머니는 자기가 일하는 곳으로 나를 못오게 하였지만 오늘은 약을 핑계로 가보려고 하였다.
나는 옷을 든든히 입고 어머니가 일하시는 시골집으로 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 보니 구들에는 방이 비좁게 말린 명태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어머니는 맨손으로 젖은 명태의 밸을 따고 있었다. 손은 벌겋게 얼어 있었고 손등은 토실감자처럼 터 있었다. (이런데 몸을 담그고 온 하루 일하시니까 온몸에 명태냄새가 날수밖에…)
“오지 말라고 했잖아? 왜 왔니?” 어머니가 기침을 콜록콜록 깇으시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장갑이라도 끼고 일하시지 않고!”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 대신 나는 저도 몰래 어머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차디찬 어머니의 손은 꼭 마치 소나무껍질처럼 꺼칠꺼칠하였다. 처녀때엔 동네에서 제일 예뻤다는 어머니의 손, 그 손으로 손풍금을 치면 온 동네에서 모여와 흥겹게 놀군 하였다는 어머니의 아름다운 손이였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무슨 손이람? 저도 모르는 사이 나의 두 눈은 어느새 눈물을 토하고있었다. 부지런한 두 손으로 나의 미래를 열어가시는 어머니, 나의 이쁜 손을 위해 오늘 어머니의 곱던 손은 엉망이 된것이다. 이런 훌륭한 어머니를 냄새가 난다고, 천한 일을 한다고 싫어했던 자신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문득 가난속에서 고생을 두어깨에 메고 나의 장래를 위해 아글타글하시는 어머니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어머니, 많이 힘드시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머니께 면장갑을 드리며 명태 두드리는 일을 하시게 하고 나는 칼로 명태의 밸을 따기 시작하였다.
나는 누가 뭐래도 어머니의 일터에 언제나 가보고 싶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기때문이다. (제3회 고급학년조 대상 수상작)
<소중한 우리 말과 우리 글>
김소정/연길시 중앙소학교 6학년
내가 어릴 때에는 조선말을 아주 싫어했다. 왜냐 하면 우리 말과 우리 글은 한어와 달라서 단어가 많고 또 매 단어에 해당되는 뜻풀이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큰 후 컴퓨터를 학습하면서 나는 우리 말과 우리 글의 위대함을 알게 되였다. 컴퓨터에서 우리 글은 영어보다 쉽다. 타자를 할 때에나 인터넷을 할 때에나 다 영어보다 간편하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만들어낸 선조들의 지혜에 탄복되였고 선조들이 정말 너무 고맙게 생각되였다.
또 우리 말은 한어와 달라서 웃사람에게 쓰는 말과 아래사람에게 쓰는 말이 따로 있다. 례를 들면 한족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밥을 먹어라”를 쓰지만 우리는 웃사람에게는 “진지 드세요”라고 쓴다. 그러기 때문에 옛 선조들이 례절이 아주 바르다는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지난 한해동안 료녕성의 단동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학교에 다녔다. 거기에는 한족들이 많고 조선족이 적어서 조선족학교가 한 개밖에 없다. 그 큰 도시에 학교가 하나이니까 집이 멀리 떨어져있는 학생은 아침 3시30분에 일어나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야 한다. 그 애들은 선생님이 적어서 공부를 잘 배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탄복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배우려고 애쓰는 그들의 굳센 의지에! 나도 그 학생들을 따라배워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10살 때쯤 세계명작 <마지막 수업>을 본적이 있다. 그 책에는 프랑스어로 마지막수업을 보게 되는 그 때의 정경을 썼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우리 말과 우리 글도 마지막 수업을 보게 될가봐 겁이 났던 것이다. 지금 연길에서는 한족학교로 가는 바람이 불고있다. 그리하여 조선족학교의 학생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족학교로 가는 학생들은 우리 말과 우리 글이 마지막수업을 보게 될것을 바라고 있는걸가?
나는 굳게 다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한족학교에는 가지 않을것이라고. 그래서 오늘도 내 연약한 힘으로나마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지켜보려고 우리 말과 우리 글이 담긴 제목을 써내려가고 있다. (제5회 고급학년조 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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