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철학 산책/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서 본 ‘회상’의 의미(2)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일까? SF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보면, 초반에 인간들 가운데 숨은 인조인간을 색출해내는 장면이 있다. 이 영화에서 인조인간은 외모나 행동으로는 전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심문관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묻는다. 그러자 기억이 이식된 인조인간은 대답을 포기하고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다. 이로써 영화는 인간에 있어서 기억이 무엇인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억이란 다름 아닌 인간 정체성의 바탕인 것이다. “그 가능성에서 볼 것 같으면 인간은 기억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본질에서 볼 것 같으면 인간은 기억이다.”라는 독일의 철학자 큄멜의 말이 그래서 나왔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억은 컴퓨터의 메모리와는 다르다. 단순히 자료만을 저장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의 기억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연결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하는 능력이 함께 있다. 이러한 능력을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상기의 힘”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이 능력을 통해서만 삶을 단지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자기를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으로 연결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프루스트가 “무의지적 기억” 또는 “무의식적 추억”이라고 부른 회상이 이 기적 같은 일을 한다. 프루스트에 있어 회상은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놓는 ‘시간의 병치’를 통해 물리적 시간에 의해서 분산된 여러 가지 상(像)들을 모은다. 그럼으로써 그때까지는 감추어졌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비평가 앙드레 모로아는 회상의 이러한 역할에 대해 입체경(立體鏡)이라는 환상적이고도 참신한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때 시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소위 입체경이라고 불리는 기구가 공간의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이 장치에는 두 장의 영상이 나타나는데 이 두 영상은 같은 대상에 대한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동일한 영상이 아니다. 두 개의 영상들은 각각 한 눈에 맞춰져 있고,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것이 겹쳐졌을 때 우리에게 뚜렷한 입체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 입체경을 만들어내는 공간적 입체상의 환각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프루스트는 입체경이 공간 속에서 만들어 낸 것과 동일한 현상이 시간 속에서 ‘현재의 감각과 과거의 기억’의 일치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일치가 시간적 입체상이라 할 수 있는 환각을 창조하고, 이로 인해 시간을 재발견하고 또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입체경이 같은 대상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영상을 겹치게 하여 “공간적 입체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회상은 같은 감각을 통한 상이한 두 시간, 곧 과거와 현재를 겹치게 하여 “시간적 입체상”을 만든다는 말이다. 이 “시간적 입체상”이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이름 지은 바로 그것이다.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자기 자신, 잃어버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프루스트에 있어 회상은 단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까지도 나란히 겹쳐놓는 일을 한다. 예를들어 <스완의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피렌체를 회상하며, 한 편에는 프레스코화를 감상하는 자신의 모습과 다른 한 편에는 봄꽃들이 만발한 베끼오 다리를 건너가는 자신의 모습을 병치시킨다. 다시 말해 주인공의 회상은 피렌체라는 이름 아래 아름다운 기억이 담긴 장소들을 골라 겹쳐놓음으로써 하나의 초자연적 공간을 구성한다.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의 끝부분에서도 주인공은 게르망트 대공의 집에서 빳빳하게 풀 먹인 냅킨으로 입을 닦다가, 그것을 통해 곧바로 발베크 해안의 한 식당을 회상하게 된다. 그러자 두 공간이 나란히 병치되면서 역시 하나의 초자연적 공간이 만들어 진다.
하지만 회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간의 병치’는 미술관에 걸린 서로 다른 그림들처럼 이질적인 공간들을 단순히 나란히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회상은 마치 서로 다른 조각들이 모여 통일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모자이크처럼 자기의 정체성에 합당한 공간들을 모아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완성한다. 때문에 이러한 공간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불변하는 정체성을 되찾게 된다.
꼭 같은 의미로 공간의 병치를 사용한 영화가 있다. 러시아의 천재적 영화작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노스텔지아>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주인공이 사랑한 두 공간이 병치되어 떠오른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성당을 배경으로 러시아 시골농가 풍경이 펼쳐지고 그 안에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있는 장면이다. 그곳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도 아니고 러시아에 있는 고향도 아니다. 그가 그토록 그리던 영혼의 고향이다. 영화는 주인공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하고 앉으면서 끝난다. 평안 그리고 안식! 이어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은 순백의 눈, 곧 구원이다.
마찬가지로 프루스트에 있어 회상은 인간이 자신의 진실한 시간, 진실한 공간 그리고 진실한 자기 자신을 찾는 방법이자,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되찾은 삶의 진실은 삶의 모든 허무함을 떨치고 소설을 쓰는 일이다. 그래서 비평가 조르쥬 풀레도 “따라서 프루스트의 사상에서의 회상은 기독교 사상에서 은총과 같이 초자연적 역할을 한다.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회상에 의한 천상의 구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시간이 파괴한 모든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회상을 통해 다시 발견해내야지 않을까? 잃어버린 시간, 공간 그리고 자신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한번, 생각해 보자!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저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청소년문학사이트 글틴(teen.munjang.or.kr)의 ‘문학을 위한 철학 통조림’게시판에 들어가면 글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김용규/자유저술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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