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어어~ 안돼 안돼 안돼. 죄송합니다. 아이가 자폐가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음식점에 갈 때면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사과하기 바빴다. 아들이 밥이 더 먹고 싶을 때면 옆 테이블에 놓인 밥그릇으로 스윽~ 하고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아들 눈에는 밥만 보였다.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저건 다른 사람 밥이야. 네 밥은 이거야. 밥을 더 먹고 싶으면 네 밥으로 더 시켜줄게. 남의 밥을 가져오면 안 돼. 적어도 백 번 이상 반복 학습이 이어진 뒤에야 아들은 옆 테이블로 손을 뻗지 않게 되었다.
아들은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너인 듯, 너가 나인 듯, 사회성마저도 느린 속도로 성장하는 ‘아들의 세계’에서는 그 선이 모호하다.
“선을 넘는다”는 말이 일상에서 사용될 땐 부정적 의미가 담기곤 하는데 사실 선을 지킨다는 건 사람이 공존해 살아가는 데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다. ‘나’ 중심의 우주에서만 살던 존재가 삶의 어느 날인가부터 ‘타인’이라는 존재를 내 우주 안으로 받아들여야만 ‘선’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도 생기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 아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 고민되는 부분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숫자, 색칠하기, 가위질하기 등의 기능적인 부분은 잘하면 좋고 못해도 어쩔 수 없다. 기능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옆에서 지원해주면 된다. 하지만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 그 의미를 가르치고 그로부터 시작하는 여러 사회규범을 가르치는 건 무엇 하나 쉽지 않다.
아들과 쌍둥이인 비장애인 딸에게 물었다. “너는 사람 사이에 있는 경계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니?” 딸은 적어도 선은 넘지 않으려 노력한단다. “너는 어떻게 그런 걸 배울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딸이 말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배운 것 같다고. 유치원 때부터 ‘남의 것’에 손대면 안 된다는 걸 알았고, 똑같은 말이라도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도 알았다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선을 넘지 않는 법을 배운 것 같다고.
음. 일단 ‘소유’의 개념부터 시작해 타인의 ‘마음’까지 고려하는 단계로 넘어가나 보구나. 딸을 통해 또 하나 배운다.
특수교육에 ‘일상생활 활동’이 하나의 교과 과정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다. 교과서로 나오기까진 아직 몇 년 더 있어야 하지만 어쨌든 학습 중심으로 구성된 특수교육에 작은 변화가 있을 예정이다.
학습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들과 실제의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느끼기에 아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딸이 유치원 시절에 자연스럽게 배운 것들을 (느린 속도로 성장하는) 아들은 전 학령기에 걸쳐 천천히 반복적으로 배워나가는 것이다. 타인과 공존하는 데 필요한 사회성 영역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공교육 안에서 수십, 수백 번에 걸쳐 반복 교육되어야 성인기의 발달장애인 아들이 ‘생존’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공존해 살아가는 이 사회 안에서 고립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류승연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