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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나쁜 화해가 좋은 싸움보다 낫다

등록 2023-06-12 18:40수정 2023-06-13 02:33

연재 ㅣ 우리 아이 고전 읽기

1836년 발표된 푸시킨의 <대위의 딸>은 1773년에 발생한 푸가초프 반란 사건을 다룬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비참한 농민의 삶을 외면하고 오로지 귀족을 위한 정치를 했던 예카테리나 2세에 항거한 푸가초프 반란 사건을 다룸으로써 러시아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중의 힘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위의 딸>은 결투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결투가 자주 등장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되는 시 못지않게 결투로 목숨을 잃은 러시아 문호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 속에서는 결투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푸시킨은 결투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주인공 뽀뜨르 안드레이치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위의 딸 마리냐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쉬바브린과 결투하기로 약속한다. 쉬바브린은 일찍이 결투로 사람을 죽인 죄로 근위대에서 외딴 요새로 쫓겨온 인물이다.

결투 입회인이 되어 달라는 뽀뜨르의 부탁을 받은 하사 이반은 결투로 사람을 찔러 죽일 셈이냐며 오히려 나무란다. 상대가 욕을 하면 욕설로 되받아치고 뺨을 한 대 때리면 되받아 때리면 그만이며 나중에 화해하면 될 것을 목숨 걸고 결투를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결투를 강행한다면 사령관에게 보고할 것이라는 엄포를 놓는다. 한마디로 결투는 국가 이익에 반하는 사악한 행위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유럽은 중세 이래 결투가 너무 만연해서 통치자들은 속 꽤 썩었다. 통치자의 입장에서 개인이 서로 살육을 일삼은 결투는 곧 통치의 불안정을 나타내기 때문에 당연히 근절해야 할 대상이었다. 군주는 법체계와 자신의 명으로 개인의 죄를 다스려야 하는데 당사자들끼리 결투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왕권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스웨덴의 구스타브 왕은 결투 현장에 나타나 ‘결투해도 좋다. 그러나 결투가 끝나면 두 사람 모두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결투를 하도 많이 해서 왕이 직접 나서 극약처방을 내리지 않으면 결투 열기를 억누르기 어려웠다. 이런 추세에 따라 푸시킨의 고국 러시아도 결투를 범죄로 여기고 엄격히 금지했다.

푸시킨은 <대위의 딸>에서 나쁜 화해가 좋은 싸움보다 낫다는 말로 결투에 반대했으며 진정한 개혁은 결국 폭력이 아니라 제도와 풍습의 개선으로 이뤄진다고 역설했다. 이토록 평화적인 진보를 열망했던 그 자신이 38세의 이른 나이에 결투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러시아 문학을 넘어서 세계 문학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박균호 교사 <나의 첫 고전 읽기 수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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