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만 해도 국회에선 임산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양복 입은 남성이 대다수인 공간에서 임부복 원피스를 펄렁이며 취재하고 기사 쓰는 내 모습은 분명 ‘튀었을’ 것이다. 나는 임신한 게 좋았다. 배에 힘주고 다니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임신 때문에 배가 나온 척, 원래부터 나온 배를 마음껏 내밀고 다녔다. 얼마나 자유롭던지.
열심히 일했다. 임신 8개월까지 일하고 육아휴직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임신 7개월에 접어들자마자 양수가 터졌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쌍둥이 자연 분만. 딸이 먼저 나왔는데 아들은 뒤따라 나오지 못했다. 56분이 지난 뒤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아들은 숨을 쉬지 않았다. 응급처치 후 아들은 “에~”하며 첫 숨을 토했고, 그렇게 살아났고, 몇 년 후 발달장애인(자폐성 장애)이 되었다.
힘들었다. 초보 엄마가 쌍둥이 육아를 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한 명은 비장애인, 한 명은 발달장애인. 우와. 진짜 그 시절을 어찌 버텼는지 다시 돌아가라면 절대 못 간다. 안 간다. 그 와중에 아들은 발달이 느려 생후 13개월부터 치료실에 데리고 다녔다.
지금 쌍둥이는 열다섯 살이다. 녀석들은 잘 크고 있다. 잘 크고 있다는 증거는, 엄마 말이라면 죽어라 안 듣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원래 사춘기는 그런 시기 아니던가. 나는 사춘기 청소년이 부모님 말씀을 하늘같이 여겨 반항 한 번 안 하고 산다면 그게 더 무섭다.
많은 일이 있었다. 지옥 같은 시간도 있었고, 각성의 순간도 있었고, 반성과 성찰과 우울의 시간, 성장과 확장의 시간도 있었다. 그 과정에 어느 시점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옛 상사가 그랬다. “승연아, 글 쓰던 사람은 글을 써야 또 살아간다”. 덕분일까.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다르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배려의 말들>이 책으로 나왔고, 첫 책이었던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은 영화로 만들어져 내년 초 개봉을 앞두고 있다. 처음엔 죽지 않으려 글을 썼는데, 지금은 아들과 더 잘 살고 싶어 글을 쓴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육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비장애인 자식은 사교육 많이 시키고 발달장애인 자식은 치료실 많이 보내는 게 ‘교육적 환경’을 제공한다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성인기를 향해가면서 그런 방향성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삶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삶’을 살면서 정작 삶이 어그러지는 걸 발견한 것이다.
앞으로 이어지게 될 <한겨레> 칼럼에선 이런 내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어쩌면 실패담일 수도 있는 내 경험이 누군가에겐 타산지석의 기회가 된다면 이 또한 의미 있을 터. 그리고 또 얘기하려 한다. 시간 속에서 깨닫게 된 가장 중요한 것, 바로 특수교육의 본질이 비장애 교육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해 나는 반복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아들의 학교생활이 딸의 학교생활처럼 즐거웠으면 좋겠다. 딸이 아들만큼 자주 행복감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다. 이 칼럼이 그런 바람을 이루기 위한 작은 디딤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류승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