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 인생을 뿌리째 흔든 두 개의 사건이 있었다. 1895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네의 ‘노적가리’를 본 것과, 모스크바 왕립 극장에서 바그너의 뮤직드라마 ‘로엔그린’(Lohengrin)을 관람했던 것이 그것이다. 나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법학자 칸딘스키는 화가의 꿈을 품고 뮌헨으로 향한다. 30세의 다소 늦은 나이였다. 그는 다시 ‘로엔그린’에서 받은 충격을 이와 같이 묘사한다.
‘나는 나의 내면에 잠재된 모든 색을 보았다. 바로 눈앞에서 광폭한 선들이 거의 광기에 가까운 드로잉을 이루었다. 나는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선과 색의 유희로 이루어진 순수회화를 보았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자신의 작품을 ‘오페라’(Opera) 대신 ‘음악극’(Musikdrama)이라 불렀다. 그는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그것과 구별되는 독일만의 새로운 오페라를 원했다. 하여, 게르만과 노르딕 신화에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자음이 부딪히는 독일어의 특징을 살린 시적 가사를 직접 썼으며 특수한 무대 조명 효과를 제작했으며 배우들의 무용과 무대미술의 회화적 표현과 급기야 자신의 음악극을 오롯하게 실현할 수 있는 극장의 건축까지 직접 설계한다. 바그너의 이와같은 전방위적인 예술적 성취를 일러 ‘총체예술론’(Gesamtkunstwerk)이라 한다.
특히, 극단적인 반음계적 불협화음과 금관악기를 주된 선율로 사용한 것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카타르시스를 일으켰고 이것은 새로운 음악의 시작이었다. 문외한에게도 ‘발퀴레의 기행’은 ‘스타워즈’의 영화음악을 연상케한다. 그의 음악은 철학자 니체를 사로잡았으며 바이에른왕국의 루트비히 2세도 마찬가지였다. 백조의 성(城)으로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한 왕이다. 이 성도 ‘로엔그린’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건물이었고, 디즈니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876년, 루트비히 2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Bayreuth Festspielhaus)을 개관한다. 말발굽 형태의 기존 오페라홀과 다르게 오케스트라 단원을 무대 아래에 배치하여 관객석에서 보이지 않게 하였고, 무대 아래의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확장된 관악기의 울림은 더욱 웅장하게 관객을 압도했다. 관객석 또한 고대 그리스의 원형 극장과 같이 경사진 계단형태로 설계하였으며 공연장 내부를 어둡게 하고 환등기를 사용한 조명효과를 구현하여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스펙터클한 무대를 선보였다. 이것은 시각적 환영으로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최초의 실험이었고 현대적인 공연장과 영화관의 효시였다.
바그너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능숙한 언변이었고, 사회 다방면에 걸쳐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저술능력도 뛰어났다. 그야말로 만인의 재능을 한 몸에 품은 사람이었다. 결국 바그너주의(Wagnerism)가 성립되었고, 당시 독일 지식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위대한 정신성의 시대를 바그너로부터 예감하게 된다.
1919년에 바우하우스(Bauhaus)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학교 창립의 목표를 이와 같이 설명한다.
‘건축 속에서 조각, 회화, 공예 등 모든 장르가 통합되어야한다. 건축 속에서 여러 예술을 통합함으로써 사라진 총체예술을 복원해야 한다.’
그의 선언문은 각양의 예술을 최초로 통섭하여 위대하게 완결했던 바그너를 계승하는 것이었고, 칸딘스키가 형태 명인(Meister, 바우하우스에서는 ‘교수’를 ‘명인’이라 불렀다)으로 바우하우스에 합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바우하우스를 유겐트스틸(Jugendstil)에서 ‘독일 공작 연맹’과 ‘바이마르 공예학교’로 이어지는 양식사적 교육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유례없는 기계전으로 참혹했던 세계대전을 겪은 그로피우스에겐 심정적으로 사상적으로 든든한 의지처가 필요했을 것이다.
바우하우스 초기의 교육과정을 주도한 사람은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이었다. 그는 전후의 상실감을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에서 찾았다. 그는 머리를 밀고 수도승의 복장으로 학생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철저한 채식주의자였고 학생들에게 강권하여 반발을 사기도 했는데, 당시 유럽에서 채식주의는 매우 희귀했기 때문이었다. 신입생들은 이텐이 설계한 예비과정, 즉 보르쿠스(Vorkurs)를 이수해야했다. 그는 말했다.
‘모든 사람은 원래 창조적으로 태어났으며, 타고난 재능을 여는 열쇠는 마즈다즈난(Mazda-znan)이 쥐고 있어. 보르쿠스를 통해 이전에 배운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자기 안에 잠재된 창조력을 해방시켜!’
이텐의 수업에선 쓰레기통에서 찾아낸 물건으로 작품을 제작했고 율동하는 곡선으로 원화를 따라 그리며 작품에 구현된 영적 표현을 찾았다. 무엇보다 호흡법과 명상을 가르쳤다는 것이 특이한데, 이것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훔쳐봤던 데미안의 은밀한 행위 바로 그것이다. <데미안> 또한 1919년에 발표된 것이므로 이텐의 수업은 헤르만 헤세의 지향과 상통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바우하우스가 개교한 이후 1925년까지는 직물과 도자 공방을 제외하면 대외적으로 이렇다할 활동이 없었다. 학교 분위기는 낡은 공예가 정신의 찬양만 있을 뿐, 현재 우리가 바우하우스하면 떠올리는 산업디자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텐의 지향은 충격적인 전쟁의 참상을 복구하려는 절실한 목적이 있었으나, 독일 표현주의적 낭만성을 벗어나지 못했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었다. 수익성을 거부하고 반기계주의적인 성향으로 교장 그로피우스와 잦은 갈등을 일으켰던 이텐은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로 대체된다.
모홀리 나기는 엔지니어의 작업복 차림으로 학생들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0년 동안 미술은 사람들의 실재적인 생활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미술 작품을 만들기 위한 개인적인 탐닉은 집어치워라!
모홀리 나기는 기계를 시대정신으로 파악했다. 이때부터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원작에서 영혼의 표현을 읽는 명상적 실습에서 재료와 구조에 대한 과학적 분석으로 바뀐다. 칸딘스키의 작업이 자연적 모티프에서 기하학적 추상으로 변모하는 것도 이때부터였다. 모홀리 나기 이후로 바우하우스는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과 러시아의 ‘구축주의’를 받아들이고 미국의 ‘포디즘’(Fordism)을 적극 수용한다.
1925년 바우하우스는 데사우 시(市)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신축 교사를 건설하여 이전한다. 그로피우스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데사우 신축 교사의 외관은 더이상 전통 공예 공방이 아니라 산업디자인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확인시켜주었다. 이곳에서 단순하고 명료하기로 유명한 산세리프체가 개발되었고, 금속이나 천과 가죽을 이용한 가구가 대량 생산되었으며, 무대 공방은 독일 아방가르드 무용의 중심이 되었으며, 결국 건축 전문학교로 거듭나게 된다. 우리가 알고있는 바우하우스의 인상은 바로 1925년 이후의 바우하우스인 것이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이우학교는 100여명의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설립자금을 모아 세운 민립(民立)학교이다. 학교 모토라면 ‘21세기의 더불어 사는 삶’이 있겠고, 2003년 9월에 개교하였으니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다. 한때 ‘교육 새희망’이 낯설지 않았던 곳이다. 매주 전국 각지에서 수업 참관하려는 선생님들이 줄을 이었고, 교정 곳곳에서 교육적 실험과 도전이 만발했다. 교실 혁신 운동이었던 ‘배움의 공동체’를 최초로 도입하여 적극 실현하였고, ‘혁신학교’ 정책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미술과에서도 미술사와 감상 수업을 확대하였으며, 중학교에선 인형극과 그림자극을 공연하고 고등학교에선 ‘한여름 밤의 꿈’이라 하여 뮤지컬을 공연했다. 모든 공연은 전교생이 배우 또는 스탭으로 참여했고 창작 대본을 기본으로 했다. 아이들이 직접 작곡도 하고 분장과 미술, 음향효과 등을 도맡았다. 교사는 단지 거들 뿐, 장기간 밤잠을 설치며 청춘의 아름다운 순간을 불태웠다.
바우하우스와 이우학교를 한 지면에 이야기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비교일수 있겠다. 그러나, 20살의 이우학교가 앞으로도 새로운 실험과 도전을 위해 바우하우스의 전개과정을 참고할 필요도 있겠기에 구태여 글을 남긴다. 20여년 동안 이우학교를 거쳐간 모든 선생님과 학생과 학부모, 교육 연구자 및 많은 분들께 새해의 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나는 어찌하여 20년동안 이곳에 있다.
글·그림 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