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느린 학습자를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한국학교정신건강의학회 학술대회에는 350여명의 의사와 교사, 교육 행정가 등이 온라인으로 참여해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사진은 김중훈 좋은교사운동 배움찬찬이연구회 교사가 주제 발표를 하는 모습. 한국학교정신건강의학회 제공
아동기에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집에 불러주는 친구도 없고 집에 놀러 오는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하고는 잘 놀았다. 학교에 입학해서는 느리고 산만하다는 평가와 함께 수업 시간에 넋 놓고 있을 때가 많았다.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했고 특히 비유나 관용적 표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초등 고학년이 될수록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워했고 특히 국어와 수학의 수준 차이가 심하게 났다. 공부에 대한 거부감과 동시에 등교 거부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른바 ‘느린 학습자’로 불리는 경계선 지능 아이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경계선 지능이란 지능지수(IQ)가 71∼84로 지적장애와 비지적장애의 경계에 있는 지능을 뜻한다. 지적장애로 분류되지 않아서 복지와 지원의 대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부모도 ‘느리고 답답한 아이’라고만 생각할 뿐 특수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학습 부진, 등교 거부, 학교폭력·성폭력 피해 등을 겪는 아이들을 파고들어가면 상당수가 경계선 지능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러한 느린 학습자들을 위해 정신과 의사들과 교사들이 모여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국학교정신건강의학회는 지난 5일 ‘느린 학습자를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를 주제로 온라인 학술대회를 열어 학교 현장에서의 경계선 지능 학생의 현황부터 이들이 보이는 다양한 의학적 문제들과 치료 모델, 교사와 부모의 지원 방법과 정부의 책임 방안까지, 경계선 지능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 발표들이 이뤄졌다.
곽영숙 한국학교정신건강의학회 회장(제주대 명예교수)은 “경계선 지능 아이들은 특수교육 지원도 못 받고 일반 교육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크다 보니 나중에 정서적인 문제까지 동반되어 문제가 복잡해지고 나면 병원에 오게 된다”며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아 간과되기 쉬운 느린 학습자들을 돕기 위해서 이번 학술대회를 마련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중훈 좋은교사운동 배움찬찬이연구회 교사는 ‘학교 현장에서 바라본 학습 부진의 현황과 문제점’ 발표를 통해서 다양한 연구 사례를 볼 때 학생의 12∼14%가 경계선 지능이고, 기초학력 미도달, 경계선 지능, 학습장애 등의 세가지 문제가 대체로 공존한다고 지적했다. 즉 겉으로는 기초학력 미도달로 드러나지만 그 기저에는 경계선 지능 또는 학습장애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고, 경계선 지능과 학습장애는 상호 동반적이라는 것이다.
방수영 노원을지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기초학습 부진으로 병원에 의뢰된 학생들을 분석한 연구를 토대로 학습 부진의 원인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지적장애·경계선지능, 우울증 등의 순으로 꼽혔으며, 느린 학습자들이 우울, 불안, 따돌림 등의 심리정서적 문제를 다수 동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권국주 충남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초등 저학년 때부터 성인기까지 ‘느린 학습자가 생애주기에서 겪는 문제들’을 한눈에 보듯 설명했다. 느린 학습자들은 청소년기가 되면 학습 격차가 더욱 커져서 수업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럽다. 학교 졸업장만 받는 데 목표를 두거나 등교 거부나 자퇴 등 학업 중단을 하게 되는데, 그 비율이 일반 청소년의 10배 이상이다. 친구 관계도 여전히 어려워서 학교폭력 피해자가 되거나 거절·도움 요청 등의 사회적 기술이 부족해 비행, 일탈, 범죄에 연루되기도 한다. 성인기가 되면 남자의 경우 군대에서 복무 부적응이나 폭력 피해를 겪기도 하고, 여자의 경우 성매매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취업에 있어서는 주로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느려터졌다’ ‘일머리가 없다’ 등의 평을 받기 쉬워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지난 5일 ‘느린 학습자를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한국학교정신건강의학회에서 곽영숙 회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한국학교정신건강의학회 제공
이에 따라 참석자들은 느린 학습자에 대한 조기 진단과 개입에 대해 입을 모았다.
김중훈 교사는 “현재는 보호자 동의가 없으면 진단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아동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학교 단위의 전문위원회를 구성해 진단 및 특수교육 권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선진국은 특수교육 대상자가 10% 정도 되는데 우리는 1%대밖에 안 되는 등 특수교육이 매우 제한적으로 지원되어 경계선 지능 아이들의 고통이 방치되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교육적 방임이 나중에 학업 중단, 학교폭력, 청소년 범죄 등으로 연결된다”고 강조했다. 방수영 교수도 “임상적 판단에 따라 약물 치료 혹은 기타 사회심리적 치료계획이 통합적으로 수행되어야 하기에 전문의의 조기 진단과 면담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학교 현장과 가정에서 이들을 도운 사례들도 발표됐다.
송푸름 인천용현초 교사는 읽기 지원, 수학 지원의 실제 사례 발표를 통해, 개별적이고 전문적인 지도로 학습 부진의 유의미한 변화가 가능함을 보여줬다. 차지민 연세나무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부모의 정서적·심리적 안정을 강조했다. 느린 학습자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오랫동안 하나하나씩 생활 태도와 사회적 기술 등을 지도해야 하는데, 부모가 지쳐서 포기하거나 우울증 또는 분노조절 문제를 겪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차지민 전문의는 “아이가 독립된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 장기간 지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은 협력에서 온다”며 “부부간의 끈끈한 전우애, 심리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소아정신과 의사 등의 조력자, 공통의 어려움을 겪는 부모 모임 등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교육부와 교육청 차원에서의 지원 방안과 프로그램, 경계선 지능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예하예술학교)의 교육 사례 등도 공유됐다.
이날 행사에는 소아정신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학교 교사, 교육청과 교육부 행정가 등 350여명이 참석했다. 곽영숙 회장은 “이렇게 많은 분들이 행사에 참석한 것은 그만큼 경계선 지능 아이들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뜻한다”며 “이번 학술대회가 학교 현장에서 이런 아이들을 찾아내어 도와주는 정책들을 마련하는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아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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