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
지금도 바이칼을 떠올리면 마음이 한없이 잔잔해진다. 그해 여름, 몽골을 거쳐 찾아간 바이칼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이륙한 비행기는 프로펠러 엔진의 구형이었다. 금방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한없이 흔들리며 날던 그 소형 비행기는 한동안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무지 산맥을 지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빽빽한 숲이 나타났다.
숲은 온통 눈부신 자작나무였다. 숲 속으로 금방 순록 떼가 지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자작나무 숲을 보며, 자작나무 숲을 꿈꾸었던 백석의 시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 당시 내 마음이 그의 시처럼 한없이 외로웠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르크추크에서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길은 끝없는 초원이었다. 시베리아 평원, 그 드넓은 풀밭에는 인적조차 드물었다. 그저 어쩌다 심심한 풍경을 상쇄시켜주려는 듯, 달랑 한 그루의 나무가 팔을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인공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 같은 그 풍경은 바이칼 호수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상상을 뛰어넘는 그 호수는 호수가 아니라 바다였고, 바다가 아니라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이고 두려움이었다. 어디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 지 알 수 없는 물결과, 너무 푸르러 깊이를 헤아리는 것조차 덧없게 느껴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타고, 바이칼 호수 안의 섬 알흔으로 건너가며, 나는 온갖 상념에 젖었다. 출렁이는 물결, 싱그러운 바람, 마치 주름처럼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호수로 흘러드는 산줄기들. 모든 것이 마음을 한없이 가라앉게 만드는 풍경들이었다.
그런 풍경의 끝에는 바다보다 넓고 아득한 바이칼 호수로 툭 떨어지는 벼랑이 아득하게 놓여 있다. 내려다보면 똥끝이 간질간질하다. 그리고 그동안 지나온 모든 길들이 까맣게 지워진다.
나는 지금도 선하게 그 바이칼의 풍경을 그려내곤 한다. 시간에 쫒기거나 나 자신을 돌아볼 순간조차 없이 바쁠 때, 혹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나는 바이칼의 그 아득하고 아련한 풍경을 떠올린다. 그러면 마음이 낮게낮게 가라앉는다. 그리운 풍경은 일상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연의 치유제가 아닐까?
최성수/서울 경동고 교사 borisogol@hanmail.net
최성수/서울 경동고 교사 borisog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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