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 찌는 듯한 무더운 어느 날 저녁 무렵에 S골목에 있는 하숙집에서 세 들어 살던 한 청년이 골방에서 골목으로 나와 어쩐지 주저하는 모습으로 K다리 방향으로 느리게 걸어갔다. 그는 운이 좋게도 계단에서 여주인과 마주치지 않았다. 5층 건물의 지붕 바로 밑에 있는 그의 골방은 방이라기보다는 벽장에 가까웠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완벽한 첫 문장이라고 칭송받는 <죄와 벌>의 시작이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S골목’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톨랴르니 골목을, ‘K다리’는 코쿠시킨 다리를 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와 그를 둘러싼 등장인물, 환경은 작가적 상상력의 소산만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쓸 당시 자신과 이웃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화상이었다.
평생을 빚에 시달린 도스토옙스키는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무려 20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집세가 밀려서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며, 집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계단 밑 공간이나 벽장이나 다름없는 틈바구니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 작가가 실제로 겪은 현실이기도 했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으로 나가는 창’으로 삼기 위해서 진흙 늪지에 건설한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화려한 궁전, 성당, 관청이 들어섰지만, 그 뒷골목에는 맨손으로 늪지를 메우고 돌을 날랐던 빈민이 가득했다. <죄와 벌>은 그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빚쟁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써야 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언제나 돈을 위해 펜을 들어야 했다. 그는 어떻게 팔리는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독자를 빠져들게 하고 매료한 그의 창작력의 원천은 신문이었다. 신문을 통해서 대중의 취향을 파악하고 그들을 움직이는 스토리를 얻어냈다.
도스토옙스키는 열렬한 신문 독자였다. 사실 <죄와 벌>의 소재 또한 한 점원이 두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 사실을 보도한 1865년 1월 <목소리> 기사에서 생각해낸 것이다. 막장 드라마 요소를 다분히 담고 있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끈 그의 소설은 사실 그가 특이한 범죄 기사와 재판 과정을 꼼꼼히 스크랩한 덕분이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에피소드와 등장인물의 사연 또한 신문 기사에서 얻은 영감이었다. 가난했던 도스토옙스키에게 신문은 저렴한 비용으로 신속하게 나라 안팎의 소식과 당시 사람들의 관심사를 알려주는 창작의 원천이었다.
그 어떤 천재적인 작가의 상상력도 우리가 실제로 겪은 사실보다 더 극적일 수 없고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다. ‘실제로 있었던 일’만큼 힘이 센 소재는 없다. 많은 작가가 개인적인 경험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이유다. 그러나 개인의 경험은 물리적인 한계가 뚜렷하므로 신문과 책을 탐독할수록 작가의 상상력 창고는 채워질 수밖에 없다. 신문 기사에는 한 사람이 아닌 전 인류의 경험이 담겨 있다. 신문이 여전히 상상력의 창고이자 창의력의 원천인 이유다.
박균호 교사 | <나의 첫 고전 읽기 수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