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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미래의 미술고객에게 필요한 미학수업

등록 2022-03-07 22:37수정 2022-04-05 14:50

연재 | 미술교실에선 무슨 일이?

지난 학기 고등학교 2학년들과 함께 후기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공부했다. 미술 교과서에서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본 사람은 없다는 잭슨 폴록과 앤디 워홀의 그림, 로이 릭턴스타인의 <행복한 눈물>, <해프닝>과 백남준의 작품을 같이 감상했다. 마침 팝아트를 대표하는 로이 릭턴스타인의 전시회가 있어 방학을 막 시작한 아이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얘들아~ 전시회 같이 가자. 로이 릭턴스타인 전시회 하더라. 이번주 금요일 같이 갈 사람?”

이내 문자 하나 달렸다.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카톡을 열었다.

“아쉽… 전 통합기행~”

상냥한 유인책이 필요할 것 같았다.

“지난 학기 수업을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거 같아요. 미학 수업 재밌었잖아~”

문자 하나 달렸다.

“ㅠㅠ 너무 가고 싶은데 통합기행이 있어요….”

통합기행을 마치면 호응이 있을 것 같아서 다시 물었다.

“통합기행 갔다 와서 같이 갈 사람?”

다시 문자 하나 달렸다.

“2차 백신 예약해놔서…^^; 저는 어렵습니다.”

단념했다. 할 수 없이 아내와 우리 집 아이들을 꼬드겼다. 파스타 외식 약속은 효과적이었다.

로이 릭턴스타인은 앤디 워홀과 함께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펄프픽션류의 싸구려 단편소설에 등장할 법한 장면이나 만화의 한 컷을 칫솔로 점을 찍어 그렸다. 벤데이 망점(Benday dots)이 그것이다. 그의 그림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정립한 미국 회화에 철저한 반명제였다.

그린버그는 페기 구겐하임(미술 수집가 겸 후원자)과 함께 잭슨 폴록을 발탁했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은 그림에서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없었고 어떠한 형태도 없었다. 심지어 붓끝이 화면에 스치지도 않았고, 이젤도 없이 바닥에 펼쳐놓고 페인트를 쏟아붓기까지 했다. 그린버그는 잭슨 폴록의 작업으로 새로운 회화를 주장했고, 급기야 미술의 중심은 파리에서 뉴욕으로 천도된다.

그린버그는 20세기 유럽 모더니스트들의 논점을 계승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회화가 왕권과 신권에 결탁하거나 복종했다고 정의했고, 르네상스 이래로 정확한 원근법으로 묘사되는 시공간과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인물 형상은 거짓의 환영(illusion)을 만들어 왕들과 교회의 권위를 높이는 데 종사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중에 아돌프 로스는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선언하며 특히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으로 가득한 교회 건축을 비난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자유와 평등의 시대적 흐름은 회화의 본질인 환영주의를 더는 용인하지 않았다.

그린버그는 인상파의 그림을 주목했다. 일본 목판화의 영향으로 몇몇 인상파들의 그림은 삼차원적 가상을 탈피하고 캔버스의 평판(flatbed)으로 수렴되었다. 그는 공간적 깊이도 형체도 표현되거나 암시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했다. 잭슨 폴록의 작업은 그의 주장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모범 답안이었다. 그린버그는 유럽 미술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미국 회화의 도래를 알렸다. 후기모더니즘 미술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물론 유럽의 전후 복구사업으로 군사적 경제적 주도권을 쥔 미국의 힘에 편승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역사상 이처럼 거대한 전환을 이끈 미술평론가는 다시 없을 것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미술평론가, 1909~1994)
클레멘트 그린버그(미술평론가, 1909~1994)
그린버그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던 잭슨 폴록이 자동차 전복 사고로 죽자, 미국 회화는 마크 로스코,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으로 변형되고 확산된다. 이들은 환영주의를 거부하고 철저한 평면을 지향하거나, 그러기를 포기한 것들은 사물이나 언어(개념)가 되었다. 어느 누구도 회화에 있어서 그린버그의 원칙을 깨트릴 수는 없었다. 평면성과 무형태성(비구상)은 미국 회화 또는 후기모더니즘 화가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금과옥조였다.

그런데 1954년 재스퍼 존스가 <깃발>(Flag)이라는 작품을 그린다. 바닥에 펼쳐진 미국 성조기를 그린 단순한 그림이다. 이 한 장의 그림으로 미국 회화의 원칙은 산산이 부서진다. 형태를 그렸음에도 철저하게 평면이었던 것이다. 뒤를 이어 로이 릭턴스타인이 등장한다. 그는 만화나 인쇄물을 따라 그리면서 벤데이 망점을 사용하여 인쇄물처럼 판판한 평판 효과를 냈다. 형태는 있으나 공간의 깊이는 없었다. 작가의 손길이나 인격마저도 완전히 배제된 기계적 인쇄물과 다름없었다. 이것은 후기모더니즘의 조종이었고 그린버그를 향한 완벽한 반항이자 조롱이었다. 팝아트로 시작되는 포스트모던 회화는 이렇게 본격화되었다.

일요일이어서 전시장은 한적했다. 도슨트 프로그램도 쉬었다. 그나마 어설픈 미술사 지식을 되새김질하였으나 용이하지 않았다. 오래 감상하거나 관찰할 바는 없었다. 학교 아이들이 따라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의 질문이 생각났다.

“선생님~ 꼭 미술사 공부해야 되는 건가요? 너무 어려워요!”

나는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 너희들은 전시 관람도 하고 그림도 구입하고, 요즘 화단이 다 팝아트 판인데 미술사나 미학적 소양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몇몇은 반항했다.

“그냥 좋으면 됐지 뭘 이해하고 설명하고… 이런 거 싫어요.”

“……”

나는 전시장에서도 난감했다. 130여점이나 되는 작품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감상하고 즐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을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이번 학기엔 어떻게 무엇을 수업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난해 마지막 서울옥션에서 이우환 작가의 <선으로부터>가 23억5천만원에 낙찰되었다. 하반기까지의 낙찰총액이 3천억원에 달할 정도로 역대 최고 수준의 호황이라고 한다. 주목할 점은 고객 연령대가 낮아졌다는 것인데, 경매장에 명품 트레이닝복과 운동화를 신은 젊은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이른바 엠제트(MZ)세대(1980년대에서 2000년대 초 출생)가 미술시장의 호황을 이끈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화운동으로 주저앉은 홍콩 미술시장의 자금이 한국에 유입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젊은층의 참여가 늘어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들 ‘엠제트 투자자’들은 상대적으로 얇은 지갑을 만회하기 위해 에스엔에스(SNS)를 활용해 유망한 신진 작가를 찾아낸다. 영국에서는 인스타그램으로 예술가들을 찾는 것이 보편적일 정도다. 세계적으로 이런 추세는 지속되고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미술계의 주요한 고객이 되기 위해선 미술 감상 교육이 필수적이리라. 특히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는 투자자로서의 안목을 좌우한다. 여전히 막막하더라도 미술 감상 수업을 계속 고민하고 모색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글·그림 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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