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
흙 엄마, 무지개 엄마
이상하게 친정에만 가면 몸이 아프다. 마음이 놓여서 그런 거다. 엄마 옆이라서 그런 거다. 내 집에서는 잘 안 아프다.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프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주도 못 가지만, 고향에 갈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엄마 곁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따뜻한 밥을 지어드려야지, 맛있는 것도 만들어 드리고, 어깨며 팔다리를 주물러 드려야지.’ 그러나 번번이 엄마가 밥상 차려놓고 깨울 때까지 늦잠을 자고, 쉴 새 없이 뭔가를 날라다 먹이는 엄마한테서 새끼 제비처럼 받아먹기만 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엄마의 노동과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겼던 어렸을 때처럼.
내 엄마는 흙처럼 살았다. 시부모님과 남편, 다섯 시누이 시동생과 네 아이를 보살피며, 농사짓고 짐승을 키우고 살림을 살아냈다. 눈물나는 일이 얼마나 많았겠고, 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도 엄마는 내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 무렵 농촌 아이들이 대부분 그랬듯 마을 동무들은 일찍부터 살림꾼 노릇을 톡톡히 하였으나, 나는 책이나 읽으며 빈둥거릴 때가 많았다. 왜 그리 키웠느냐고 나중에 물어보았더니, 일을 잘하면 나중에도 일하고 살게 될까봐 그랬단다.
엄마의 바람(?)처럼, 나는 지금도 살림꾼이 못 된다. 두 아이 키우는 내내 엄마 노릇을 하기보다 내 꿈을 꾸는 데 열중해 있을 때가 많고, 먹이고 입히고 뒷바라지하는 데 소홀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잘 자라주는 것이 신기하고 고맙고, 이건 아무래도 내가 한 일은 아니지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현경은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라는 책에서, 생물학적 엄마가 되지 못함을 못내 슬퍼하면서도, 세상 모든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식한다.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젖을 먹여주는 엄마도 있어야 하지만, 영혼을 먹여주는 무지개 엄마는 더욱 많아야 한다(그 엄마가 꼭 생물학적 여성일 필요는 없다). 그래야 젖과 밥을 주는 엄마가 없는 아이들도, 사랑과 희망을 먹고 자신과 세상을 믿으며 자랄 수 있을 테니까.
기꺼이 흙이 되어준 엄마가 있었기에, 나는 마음 놓고 하늘만 오래 쳐다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 무지개 엄마에 대한 꿈-씨앗이, 내 마음 밭에 떨어졌나보다.
선안나/동화작가 sun@iic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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