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에 열리는 청소년 축제.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제공
한 마을이 있었다. 인구 구성에서 젊은층의 인구가 많고, 청소년 인구, 영유아 인구도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공공도서관이나 주민 문화시설이 거의 없었다. 그때 마을 한복판에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이름은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이하 공터). 청소년문화시설과 공공도서관을 동시에 겸하는 곳이었다. 3개 면이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창으로 장식된 건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6층짜리 건물에는 도서관과 스터디카페, 밴드실, 작업장과 활동실, 강의실이 알차게 들어가 있었다. 만화책과 보드게임, 피아노, 당구대, 노래방까지 갖춘 ‘유스카페’와 청소년들이 스스로 운영해볼 수 있는 ‘반짝매점’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공터는 주민들에게 공간을 개방하고 주민 강좌를 열고 마을에 필요한 것을 물었다.
그렇게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크고 작은 모임을 만들고, 자치단체를 만들고, 마을 축제를 열고, 아이들을 함께 키우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든든한이웃’과 ‘도서관일촌’, ‘꿈마을공동체’ 등 다양한 자원봉사 조직과 회의체를 만들었고, 아이들은 1년에 50~80개의 동아리를 만들고 해체했다. 댄스·그림·만들기 등 많은 문화예술동아리와 청소년협동조합도 생겨났다. 자기 삶에서 불편하고 부당한 의제를 찾아내 구체적인 변화를 위한 실천을 해나가는 ‘시작된변화’ 동아리에는 유기견을 보호하는 모임, 버려진 땅에 식물을 심는 모임, 월경에 대한 인식 개선을 벌이는 모임 등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5월에 열리는 어린이날 잔치와 가을에 열리는 청소년 축제에는 온 마을이 참여했다.
지금은 전국에서 이 마을과 마을의 구심점인 공터를 견학하러 온다. 마을에 ‘교육력’이 있다는 걸 배우러 오는 교사들, 마을공동체운동을 하는 사람들, 도서관을 활성화하려는 사람들, 청소년문화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도서관과 청소년시설의 만남이 어떻게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 오는 24일 개관 12년 생일을 맞는 공터를 찾아갔다.
2011년 문을 열었을 때부터 운영을 맡아오고 있는 이승훈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장.
매년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50~80개 동아리들
“경험이 최고의 학습이고, 최고의 경험은 마을과 일상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저희의 운영 철학입니다.” 2011년 설립 때부터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 이승훈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장의 말이다. 그는 사회복지학 석사를 딴 뒤 서울과 부산 지역에서 청소년문화운동과 마을공동체운동 등을 해왔다. 노원구청이 공터를 지은 뒤 성공회대 산학협력단에 위탁을 맡겼고, 성공회대는 이승훈 센터장을 운영책임자로 섭외했다.
“도서관으로만 운영하자니 청소년들이 설 자리가 없고,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키우면 도서관이 왜 이렇게 시끄럽냐는 민원이 우려됐어요. 전국에 도서관과 청소년시설을 겸하는 롤모델도 없다 보니 어떻게 조율해야 될지가 가장 큰 숙제였지만, 오히려 이런 조합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봤어요.” 옛날에 마을마다 있었던 공용 우물터가 되기로 한 것이다. “전통적인 도서관을 뛰어넘고 서비스 중심의 청소년시설을 벗어나서 다 같이 만들어가는 공용의 공간으로 공터를 만들기로 했지요.”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고 활동하고 실천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줬다. 물론 그 중심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뒀다. “교육이나 육아 문제로 접근하면 여러가지 이해관계와 갈등을 뛰어넘고 힘을 모을 수 있죠.”
마을 견학을 온 사람들은 묻는다. “여기 아이들은 왜 이래요? 요즘 아이들은 안 이런데….” 아이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에 사람들은 놀란다. 이곳에서는 고3 아이들도 스스로 찾아와 동아리를 만든다. “이거라도 해야 숨통이 트일 거 같아서요”라며. 학교 동아리 활동은 기록과 평가의 대상이지만, 여기서의 활동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기록되고 평가된다.
매년 5월에 열리는 와글와글 어린이 잔치의 모습.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제공
중학생 때부터 5년간 매년 ‘청소년 인권’ ‘환경’ ‘유기묘’ 등의 새로운 주제로 ‘시작된변화’ 동아리 활동을 해온 김아현(대진여고 3학년)양은 지난해에는 ‘청소년 자존감 다이어리’를 만들어서 친구들과 써보고 주변에 배포하는 활동을 벌였다. “고등학생 1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도 벌여보고 친구들과 연구해본 결과,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을 쓰는 게 자존감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이어리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김양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친구들과 구상을 하고 실천을 해내는 과정이 재미있어서 매년 새로운 주제로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하게 됐다”며 “대학생이 되면 동아리의 멘토로도 활동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청소년 놀이동아리 ‘팔딱팔딱’도 아이들이 만들어낸 동아리다. 이 동아리는 동네 아이들을 불러내 함께 술래잡기,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말걸기 등 다양한 몸놀이를 한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회원들이 종종 다른 동네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까지 불러내서 논다. 신효경(상명고 2학년)양은 “휴대폰 말고도 아이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던 차에, ‘놀고 싶은 사람 모여라’라는 포스터를 보고 참여하게 됐다”며 “전통놀이들을 많이 알게 되고 다른 친구들에게 이 놀이들을 전파하면서 체력도 향상되어 좋다”고 말했다. 신양은 “공터에는 무료 스터디카페뿐만 아니라 다양한 청소년 휴게 공간이 있어서 일주일에 2~5번 간다”며 “앞으로 공터에서 청소년끼리 할 수 있는 반짝매점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공터에서 청소년 사서로 활동하고 있는 마시은(공릉중 2학년)양은 공터에 대해 “소중한 선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도서관에서 독서토론 등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는 활동을 하는 그는 “직접 무언가를 기획하는 활동을 하니까 성취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언니 오빠들과의 만남에서 많은 것을 배우니까 나에겐 좋은 기회와 경험을 준다”고 말한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운영해보는 반짝매점.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제공
공터가 선물 같은 존재임은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공터가 문을 연 2011년부터 ‘든든한이웃’이라는 자원봉사 조직에 참여한 국순혜씨는 “내 삶이 공터가 생기기 전과 후가 많이 다르다”고 말한다. “도서관이 없던 마을에 도서관이 들어서서 설렜고 반가웠다”는 그는 지난 10여년간 인생의 따뜻한 추억을 공터에서 많이 쌓아올렸다. 공터에서 다양한 봉사 활동도 하고 여름방학이면 도서관에서 1박2일을 보내기도 했고, 자녀는 공터에서 진행하는 지리산 무박2일 종주에도 참여했다. 지금은 공터 1층에 자리한 되살림가게에서 주민들이 기부한 물건을 팔아서 수익금으로 마을 청소년들을 돕는다. 마을해설사로 마을여행을 온 사람들을 안내한다. 또 공터가 운영하는 ‘북카페 다락’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수익금을 마을에 되돌려준다. “엄마가 자원봉사 활동에 바쁘다 보니 아이가 훨씬 자립적으로 큰 것 같다”는 그는 “예전에는 돈 벌면 다른 동네로 이사 간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동네가 좋다는 사람들이 많고 그렇게 동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살아서 좋다”고 말했다.
이선옥씨는 공터에서 진행한 ‘도서관학교’라는 인문학 강좌를 듣고 “개인적인 만족이나 자기계발을 위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독서로 삶이 달라지고 마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도서관일촌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도서관일촌은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자원봉사 모임이다. 아이들이 도서관에 오는 게 즐겁도록 다양한 책 놀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씨 역시 마을해설사, 북카페 다락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한다. 이씨는 “경단녀로서 내 존재가 학부모로서만 살아가고 마을에서의 삶이 없는 답답함이 있었는데, 공터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하면서 우리 마을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마을해설사가 마을여행을 안내하고 있는 모습.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제공
어떻게 이렇게 자발적인 모임과 활동이 활성화될 수 있었을까. 모두들 “이승훈 센터장의 철학과 실천 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국순혜씨는 “이승훈 센터장이 주민들에게 ‘뭘 하지 마세요’라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 주민들이 뭘 해보고 싶다고 하면 ‘하세요’ 하면서 지원해준다”고 말했다. 이선옥씨는 “다른 지역에서도 마을공동체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왜 이승훈 센터장에게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응했을까 생각해보면 진심이 전달되어서 그런 거 같다”며 “특히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도서관을 가지고 있는 공공기관이 이런 역할을 해주니까 많은 사람들이 더 믿고 참여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평가에 대해 이승훈 센터장은 “청소년에게만 집중하기보다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니까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해주시는 것 같다”며 “청소년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환대하면서 주민들도 동반성장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공터가 5년차가 되었을 때 그간의 성과를 <우리가 사는 마을>(학교도서관저널)로 정리한 데 이어, 최근에는 10년의 역사를 <청소년 활동, 어떻게 할까?>(학교도서관저널)로 펴내기도 했다.
공터의 앞으로의 계획은 뭘까? “지난해 여러 동네 단체들이 마을토론을 하면서 10년 뒤 우리 마을이 어땠으면 좋겠는지 상상을 했다”고 한다. 합창단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을호텔도 지었으면 좋겠다, 어린이·청소년들의 놀이와 웃음소리가 마을 골목골목 전체에 퍼지는 마을이 됐으면 좋겠다는 등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 상상이 실현되는 것이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